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인류사 전체를 두고 살펴봐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대란(大亂)이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이어진 이 혁명에는 미증유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거대한 중국 사회 전체의 사고와 생활방식이 뒤흔들려 버렸다.
문화대혁명이 발동될 당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인한 경제적 파국으로 국가주석 지위를 사임하고 2선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피땀흘려 이룩한 공산주의 중국의 사상이 변질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당중앙의 최고 지도자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성과제를 인정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했는데, 이건 마오에게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로 되돌리는 위험한 수정주의로 보였다.
마오쩌둥은 권좌를 되찾고 ‘순수한’ 공산주의 노선을 집행하려 했는데 그가 권력 쟁취 수단으로 삼은 건 특이하게도 군대나 총도 아니고 수뇌부 내의 파벌 싸움도 아닌(결과적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무수한 젊은 홍위병들을 동원한 권력 외곽으로부터의 시위 투쟁이었다. 마오는 공산당 최고 지도자였을 뿐아니라 역대 8번째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영웅으로 위광(威光)을 당내에서 견줄자가 없었다. 그가 젊고 덜 여문 홍위병들을 대량으로 불러모아 사상적 열기를 주입시키니, 이들은 전국을 누비며 낡은 관습을 때려부수는 운동을 벌였다.
마르크스 사상은 무신론을 주창하지만 그 정서적 영향력은 기성 종교와 아주 흡사하다. 해방자가 되서 싸우라는 슬로건은 대중에게 어떤 열광심을 불어넣는데, 그렇게 각성된 인민들은 종교집회에 모인 신앙인처럼 행동한다. 문화대혁명 때의 홍위병이 딱 그랬다. 타도 대상이 되었던 것은 4개의 낡은 것(四舊)으로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이었다. 그리고 이런 낡은 습속을 가진 걸로 보이는 사람은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마오가 자기 노선을 거역한 당 지도자로 여겼던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더화이 등이 집단 난리 통에 중앙부 권력으로부터 손쉽게 제거되었다.
당시 국가주석이던 류사오치는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조직가로 강직한 서생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폭력 학생(홍위병)들로부터 ‘수정주의의 두목’,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 로 성토당하며 정치 권력은 물론 일신의 자유도 잃었다. 홍위병들은 자택을 무단으로 수색 했고, 그를 강제로 비판대회에 끌어다 놓았다. 집회에 모인 대중 앞에서 ‘제트기’ 자세를 한채 얻어맞았는데, 류사오치의 어린 자식들은 부모가 맞는 것을 억지로 지켜보아야 했다. 1968년 당은 류사오치에 대한 영구추방을 승인한다. 1969년 베이징에서 하남 개봉으로 이송되었는데 벌거벗겨진채 군용담요에 말려서 들것에 실려왔다. 한 때 중국의 국가 수반이던 인물이 짐짝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후 콘크리트 창고에 감금되었는데, 결국 폐렴이 생겼고 고열과 구토가 끊이지 않았다. 담당 의료진들은 당이 숙청한 인물을 돌보는게 두려웠는지 제대로 된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 류사오치는 1969년 11월 사망한다. 향년 71세. 다른 지방으로 추방된 상태였던 그의 부인과 자식들은 사망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문혁으로 박해받은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라오서는 항일 경력이 있는 문학작가였다. 중국 하층민의 애환을 묘사한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서방 세계에도 문명이 있었던 그는 당시 67세 였다. 10대 후반이던 베이징 제2, 12, 23, 63 중학교(중고교에 해당)학생들과 중앙예술학원 학생들은 이 노작가를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구타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라오서는 홍위병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이들이 씌운 ‘흑색 우파분자’, ‘괴물’, ‘반동학자’라는 표찰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하지만 그 바람에 더욱 심하게 맞았을 뿐이다. 다음날 그는 더성먼(德勝門) 근처 타이핑 호수에 투신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식 뻘의 홍위병들에게 박해 당한 많은 혁명 원로와 지식인들과는 반대로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는 도를 넘어갔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축하하는 집회가 열렸다. 광장 안에는 100만명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모였다. 그들은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노래인 ‘동방홍’을 부르면서 오래 기다린 끝에 비치는 햇살과 함께 등장한 그들의 최고사령관을 맞이하였다. 접견대에 선 마오를 바라보며 젊은 홍위병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공산주의의 대중집회는 신격화된 마오쩌둥을 위한 종교집회와 다름없었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큰 난리를 일으켜 큰 다스림을 얻는다는 대란대치(大亂大治)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란까지만 이루어지고 대치는 어디갔는지 모르게 되었다. 특히 공산당 중앙이 두 개로 쪼개져 버렸다. 새롭게 등장한 파벌은 마오의 아내인 장칭을 포함한 네 명의 극렬 좌파 인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사인방'(四人幇)이라 불렸다. 이들은 마오가 띄워놓은 열기에 편승해 정치 구호 위주의 투쟁을 벌였다. 성능이 월등한 외국 선박의 수입을 허가했던 덩샤오핑을 외국 기술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식이다. 하지만 사인방은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에 기반이 없었고 문혁동안 많은 군출신 원로를 숙청한데다, 인민 생활의 향상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군부와 대중의 지지 없이 마오쩌둥에게만 의지해 권력을 유지했는데, 결국 마오 사후 원로 군부파의 당부주석 예젠잉이 주도한 숙청 계획에 걸려들어 모두 체포된다. 이후 예젠잉이 지지한 덩샤오핑이 복권되어 중앙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문화대혁명에 대한 당의 공식 평가가 이때 확정된다.
문화대혁명의 공과를 논하는 것은 대다수 인민에게 신격화 되어있는 마오쩌둥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라 아주 민감한 사안이었다. 말하자면 열렬한 이슬람교 신자들 앞에서 “선지자 마호메트도 무언가 어쩌면 아마도 잘못한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운을 띄우는 격이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이를 지혜롭게 처리한다.
여전히 마오가 일으킨 문혁을 지지하던 화궈펑을 중심으로 한 파벌은 “마오 주석의 지시라면 우리는 모두 시종일관 변함없이 따라야 한다” 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덩은 마오 역시 옹호했던 실사구시 정신에 따라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实践是检验真理的唯一标准)” 라고 주장했다. 실천을 통해 옳음이 입증된 정책을 추구해야 하는데 문혁은 그렇지 못했으므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공식적으로 채택된 당 보고서의 주요 내용이다.
문혁의 좌편향의 과오, 그리고 이러한 과오가 거대한 규모로 장기간 지속된 것에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 동지에게 있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잘못된 지도하에서 행해졌으며, 이것은 다시 린뱌오 및 장칭 등의 반동세력 등에게 포섭되어 당과 인민에 수많은 재난과 혼란을 범했다. 마오쩌둥 동지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전략가, 이론가이다. 그는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에서 중대한 과오를 범했지만, 그의 전생애를 보면 중국혁명에 대한 공적은 과오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공적이 제1주의적이고, 과오는 제2주의적이다.
덩샤오핑은 문혁을 부정하면서도 마오쩌둥의 과(過)를 넘어선 공(功)을 인정함으로, 그를 숭배하는 대중의 지지도 잃지 않는 현명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