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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을 잉크 삼아 쓰는 중국 주식 투자 후기 I

저의 회고는 2016년 6월 25일 브렉시트 다음 날부터 시작합니다.

어제 브렉시트(brexit)로 나의 중국 주식, 즉 상해와 홍콩 시장 종목들은 다시 수직 낙하를 했다. 충분히 떨어졌었다고 생각했지만 더 떨어져 버렸다. 이제 HTS를 켜고 손익률을 확인하는 게 두려울 정도이다. 평소 소비에 있어 검소와 가성비(가격대 성능비)를 추구했던 내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중국 주식에 넣게 되었는지, 악몽 같은 지금 상황에서도 의아한 기분이다.

내가 좋아하는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을 했다. “Life can only be understood backwards; but it must be lived forwards”. 삶은 살아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미래를 보며 살아야 한다 라는 의미이다. 지금 피눈물을 잉크 삼아 중국 주식 투자 후기를 쓰는 이유는, 과거를 회고해서 정리하고, 그중 이해되는 것에서 희망을 찾아 향후 투자에 시금석으로 삼으려는 의미이다.

필자의 주식 투자는 중국이란 나라의 역사책을 읽는 게 재미있고, 미래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는데서 시작되었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中國에 있다고 믿고 동서남북의 나라들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등으로 불러왔다. 하지만 중화사상(中華思想)도 결정적 도전을 받는 시기가 왔다. 아편전쟁으로 문이 열리는 서구 열강의 침략이었다. 이전의 오랑캐들은 전쟁을 걸면서도 중국을 세계 최고, 최대의 국가로 인정 했었다. 거란의 요나라도 여진의 금나라도 몽골의 원나라도 만주의 청나라도 그랬다. 그런데 서양 세력은 중국을 뛰어넘는 군사력 이외에도 고유의 문명, 문화적 발전상을 가지고 있었다.

2천 년 가까이 공맹(孔孟)의 유교 문명을 자신들, 그리고 다른 모든 민족이 추구해야하는 지고(至高)의 이상이라 여겼던 중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자존심 상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상적 돌파구를 찾는다. 그중 하나가 당시 세계의 부르주아(bourgeois) 문명 국가들을 유령처럼 홀리고 있던 공산주의 사상이었다. 창시자인 독일의 마르크스는 중국과 같은 농업생산 국가에서 근대적 공산혁명이 일어날 거라 전혀 생각지 않았다고 하지만, 혁명은 일어나고 말았다.

지도자인 모택동은 중국 강서 남부 산간의 정강산(井冈山)에서 35세 나이에 수 백명의 평민 출신 군대를 이끌고 일을 시작했다. 공산주의 간판을 걸고 있었지만 평범한 외부인에게는 산에 사는 비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 초라한 집단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향후 중국 전토를 점령하고 현대 중국을 지배하는 엘리트의 뿌리가 되었다. 이들은 서양에서 건너온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역사 발전 이론을 공부했지만, 구체적 실현 수단은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 중국에는 자본주의 발달이 미약해서 대형 자본가들도 별로 없었으므로 봉건 지주와 민족주의적 군벌 연합 세력(장개석)을 주요 투쟁 대상으로 삼았다. 마르크스가 써놓은 이론과는 다른 정치 군사적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요즘 해외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IS를 보면 홍비(紅匪)로 불리던 예전 중국 공산 게릴라 집단과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모택동과 주덕(朱德)의 중국 공산당 홍군(紅軍)은 현대 유격 전술의 완성자 답게 대규모 정규군을 이끄는 세력(장개석 군)에게 악몽 같은 전술과 의지를 선보였다. 현대의 서방 군대에게 IS가 악몽인 것과 비슷하다. 적이 다가오면 산으로 숨고, 적이 산까지 들어오면 매복했다가 한 명씩 사살하고, 지친 적이 후퇴하면 쫓아가서 기회를 잡아 타격했다. 화가 난 장개석이 정강산 전체를 70만 대군을 동원해 포위하고, 콘크리트 토치카와 가시철조망을 구축하며 신중하게 접근하자 이들은 대규모 탈출전을 벌였다. 장장 370일에 걸쳐, 9600km의 거리(서울 부산 거리의 30배)를 걸어서 중국 서부 내륙의 연안(延安)으로 이동했다(大長征).

이들은 중국에 들어온 일본제국군과도 싸웠고, 일본이 패망하자 장개석 군대와 다시 싸워 그들을 작은 섬 대만으로 쫓아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6.25 전쟁에서 그들은 2차세계대전을 통해 최강의 군대로 입증된 미국군에게 도전했다. 미국이 일본에 썼던 핵폭탄을 중공군 상대로도 쓸 거라는 예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은 “상대가 원자폭탄을 쓰면 우리는 수류탄을 쓴다” 고 말하며 전쟁에 개입했다. 중공군 정도는 간단히 압살해 버릴 수 있다던 맥아더의 호언과는 달리, 팽덕회가 이끄는 중공군은 두 달여 만에 북한 전역을 미군과 연합군에게서 도로 빼앗았다. 공업 생산량이 미국에 비해서 없다시피 한, 그래서 전쟁에 필요한 중화기 생산 물량이 극단적으로 뒤짐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낸 전적이다. 산업 기반이 없는 IS가 서방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보이는 대담하고 막 나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만일 우리나라가 중공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미국에게 싸움을 걸었을까? 미국은 원자탄을 자기 마음먹은 자리에 떨어뜨릴 수 있고, 대규모 함대가 있어 해안 어디서든 상륙 작전을 벌일 수 있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와 소총만 가진 군대로 전쟁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절대 못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중공은 했고, IS도 지금 하고 있다. 세계 대부분 나라가 못할 일을 중공과 IS는 시도했으니 둘 사이에는 결정적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건 하나의 이념으로 지배 국민을 강하게 결집시키는 능력이다. 중공은 중화 민족주의와 결합된 공산주의 사상으로, IS는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으로 그런 전체주의를 이루었다. 중국은 전체주의의 힘을 가지고 전쟁 말고도 눈부신 경제 성장까지 이루었다. 전쟁으로 미국에 타격을 입혀서 쉽게 침략하지 못하는 군사 강국이 된 건 모택동 대의 공로이고, 10억이 넘는 국민을 경제 발전에 동원해서 현재 G2의 위상으로 국가를 올린 것은 등소평 대의 공로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서 하도록 하겠다.

피눈물을 잉크 삼아 쓰는 중국 주식 투자 후기 II

중국의 영원한 총리

주은래 II.jpg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중국의 초대 총리로서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총리의 자리에 있었다. 유교식 전통교육과 서양식 교육을 같이 받았던 그는 명목상 공산주의 혁명가지만 실제적으로는 황제나 다름 없던 마오쩌둥의 충성스러운 재상 역할을 했다.

중국 국가 주석이던 마오쩌둥은 대중을 동원하는 급진적이고 정치 우선적인 정책을 선호하여 ‘대약진운동’ 이나 ‘문화대혁명’ 등을 일으켰다. 운동에 동원된 대중들은 종교와 같은 사상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고 그걸 실행하는 수단은 너무 폭력적이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실용적이고 완급을 조절하는 정책을 추구했으며 그 때문에 마오쩌둥으로부터 대중운동의 잠재력을 믿지 않는 인물로 경계를 받았다. 그래도 저우언라이는 자기 능력 하에서 폭력으로 숙청되는 옛 공산당 동지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덩샤오핑이었다.

마오쩌둥은 총리가 비록 자신의 정책에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않지만 결국 온건 노선을 버리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를 후계자로 고려하지 않았다. 마오가 말년에 공식 후계자로 삼았던 인물은 중공 개국 십대 원수중 한 명인 린뱌오(林彪;임표)였다. 린뱌오는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야전사전관으로서 나이는 십대 원수중 가장 어렸지만 서열은 홍군의 창건자 주더와 한국전쟁에서 중공군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의 뒤를 이은 세 번째였다.

​장제스과 마오쩌둥의 초한지(楚漢志)였던 국공내전의 승부를 결정지었던 3대 전역(戰役)이 있었다. 린뱌오는 이 중 두 개인 랴오선(遼瀋) 전역과 핑진(平津) 전역을 승리로 이끌었다. 랴오선 전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남긴 공업 시설이 밀집된 전략적 요충지인 만주 전체를 손에 넣었고 핑진 전역에서는 텐진에 이어 수도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나머지 하나인 화이하이(淮海) 전역을 지휘했던 건 류보청(劉伯承)과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린뱌오는 인민해방군내 기반도 있고 주석의 신임도 있어 후계자로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대약진운동에서도 문화대혁명에서도 마오쩌둥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고, 개인 숭배 운동에도 열을 올리던 그는 하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린뱌오 파벌은 국가주석직의 승계를 두고 조바심을 드러내면서 마오쩌둥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다. 숙청 움직임에 위기를 느낀 이들은 반란 계획을 세워보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군용기를 타고 급히 소련 방면으로 도주한다. 하지만 비행기가 몽골의 초원에 추락하는 바람에 린뱌오와 그의 처, 아들을 포함한 일당 전원이 폭사했다. 숙청 위험에 처하자 마오쩌둥을 제거하려는 모험을 한 린뱌오와 저우언라이는 잘 대비가 된다. 최후의 만다린(Mandarin;궁정관료)이라고 불렸던 저우는 늘 마오쩌둥에게 순종적이었고 유교시대 군주를 대하듯 그를 극진히 보좌했다.

마오쩌둥의 허무한 후계자였던 린뱌오가 사라지고 나서 중공의 정치국 세력은 둘로 나뉘었다. 문화혁명을 적극 지지하는 마오의 아내 장칭(江靑;강청)을 중심으로한 사인방(四人帮) 세력과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및 혁명원로들로 이루어진 실무파 세력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두 세력을 번갈아 지지하면서 양측이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저우언라이는 사인방으로부터 줄곧 정치적 공격을 받았고 말년엔 방광암 선고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좌우명으로 삼은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1대로 일했다.

총리의 근무 시간은 기록으로 남겨져있다. 1973년 72일간을 병상에서 보냈지만 병상에서도 비서들을 불러 매일 집무를 한다. 다시 병원에 입원하기 전 기간인 1974년 1월에서 5월까지 총 139일 동안 12~14시간 일한 날이 9일, 14∼18시간이 74일, 19~23시간이 38일, 24시간 꼬박 세운 날은 5일, 근무시간이 12시간 이내인 날은 단 13일 이었다. 정신력과 사명감 없이는 결코 견디지 못할 일정들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몸은 1975년 가을부터 대소 10회의 수술을 받으며 급속하게 쇠약해졌다. 그해 12월 저우언라이는 문병 온 당부주석겸 국방상이었던 예젠잉(葉劍英;엽검영)에게 암성 통증을 참으며 “권력이 그들(사인방)의 손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고 말한다. 그는 자신과 마오쩌둥 사후에 벌어질 권력 투쟁을 걱정하고 하고 있었다. 이듬해 1월 8일 저우언라이는 사망한다. 마오쩌둥의 사망보다 8개월 앞선 시점이었다. 아래는 그의 사망을 기록한 바르바라 바르누앙(Barbara Barnouin)의 책 <저우언라이 평전>의 구절이다.

​1976년 새해 아침 신문들은 마오가 1965년 쓴 시 두 수를 개재했다. 저우는 마오에 대한 그의 마지막 충성을 보이듯 그의 보좌관들에게 그 시를 읽어달라고 했다. 그 후 저우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1월 5일 저우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틀 뒤인 밤 11시 마지막으로 깨어났다. 저우는 눈을 떠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의사들에게 희미하게 말하기를, 그들이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으니 그들을 필요로 하는 다른 환자들을 돌보라고 말했다. 이것이 저우의 마지막 말이었다. 저우는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에 사망했다. 향년 78세.

다음은 저우언라이의 사망에 대한 당의 보고를 듣는 마오쩌둥의 모습이다. 일본 산케이 신문 발행의 <모택동 비록> 책에서 옮겼다.

​저우언라이 사망에 관한 당 정치국의 정식 보고서는 오후 3시가 지날 무렵, 폐와 심장을 앓아 누워 있던 마오쩌둥에게 전달되었다. 당직 간호원은 그것을 천천히 읽었다. “위대한 프롤레탈리아 혁명가이며 걸출한 공산주의 전사인 저우언라이 동지는 암을 앓아 치료한 보람도 없이 1976년—” 마오쩌둥의 감겨진 눈으로부터 눈물이 흘러나와 빰을 적셨다.

사인방이 장악한 인민일보등의 언론매체들은 죽은 정적 저우언라이를 찬양하는 보도를 억제했다. 하지만 대중은 자발적으로 추모를 위해 나왔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한지 3개월이 지난 1976년 4월 4일의 청명절(淸明節,죽은 사람을 기리는 명절)날 추모는 절정에 달했다.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중심의 38m 높이의 인민영웅기념탑에는 주은래의 거대한 초상화가 설치되었고 무수한 꽃 장식으로 주위 대좌가 파묻혔다. 초상화 밑에는 검정색 바탕에 흰 글자로 “우리들은 밤낮 경애하는 저우 총리를 생각합니다” 라고 쓰여진 플래카드가 있었다. 이날 천안문 광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20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하지만 사인방 세력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그 반대파인 자신들을 비판하는 이 집회를 강제 해산해 버린다. 집회의 배후로 몰렸던 덩샤오핑은 일생에서 세 번째 실각을 당해 쫓겨난다. 이로부터 몇 개월 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문화대혁명의 지속을 외치는 사인방 파벌과 예젠잉을 중심으로 한 혁명 원로 파벌간의 피할 수 없는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던 예젠잉은 마오가 생전에 지명한 마지막 후계자 화궈펑(華國鋒;화국봉)과 연합했다. 이들은 대중적 인기가 떨어지고 민병 밖에 동원할 수 없던 사인방 – 장칭(江靑),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 을 하루 사이에 모두 체포해버린다. 사인방의 몰락은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는 당내 세력의 종말이 되었고, 덩샤오핑이 복귀할 길도 열리게 된다.

인민해방군에 기반이 없고 파워 게임에 서툴었던 화궈펑은 복귀한 덩샤오핑에 의해 쉽게 제거되었다. 결국 저우언라이가 죽기 전 예젠잉에게 당부한대로 권력은 사인방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따라 개혁정책을 펼칠 덩샤오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Notes:

  1.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중의 구절. 삼가 공경스럽게 몸(躬)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할지니, 다만 죽은 후에나 그칠 것입니다 라는 의미.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 이라는 대란대치 大亂大治

Cultural Revolution.png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인류사 전체를 두고 살펴봐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대란(大亂)이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이어진 이 혁명에는 미증유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거대한 중국 사회 전체의 사고와 생활방식이 뒤흔들려 버렸다.

문화대혁명이 발동될 당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인한 경제적 파국으로 국가주석 지위를 사임하고 2선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피땀흘려 이룩한 공산주의 중국의 사상이 변질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당중앙의 최고 지도자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성과제를 인정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했는데, 이건 마오에게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로 되돌리는 위험한 수정주의로 보였다.

마오쩌둥은 권좌를 되찾고 ‘순수한’ 공산주의 노선을 집행하려 했는데 그가 권력 쟁취 수단으로 삼은 건 특이하게도 군대나 총도 아니고 수뇌부 내의 파벌 싸움도 아닌(결과적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무수한 젊은 홍위병들을 동원한 권력 외곽으로부터의 시위 투쟁이었다. 마오는 공산당 최고 지도자였을 뿐아니라 역대 8번째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영웅으로 위광(威光)을 당내에서 견줄자가 없었다. 그가 젊고 덜 여문 홍위병들을 대량으로 불러모아 사상적 열기를 주입시키니, 이들은 전국을 누비며 낡은 관습을 때려부수는 운동을 벌였다.

마르크스 사상은 무신론을 주창하지만 그 정서적 영향력은 기성 종교와 아주 흡사하다. 해방자가 되서 싸우라는 슬로건은 대중에게 어떤 열광심을 불어넣는데, 그렇게 각성된 인민들은 종교집회에 모인 신앙인처럼 행동한다. 문화대혁명 때의 홍위병이 딱 그랬다. 타도 대상이 되었던 것은 4개의 낡은 것(四舊)으로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이었다. 그리고 이런 낡은 습속을 가진 걸로 보이는 사람은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마오가 자기 노선을 거역한 당 지도자로 여겼던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더화이 등이 집단 난리 통에 중앙부 권력으로부터 손쉽게 제거되었다.

당시 국가주석이던 류사오치는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조직가로 강직한 서생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폭력 학생(홍위병)들로부터 ‘수정주의의 두목’,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 로 성토당하며 정치 권력은 물론 일신의 자유도 잃었다. 홍위병들은 자택을 무단으로 수색 했고, 그를 강제로 비판대회에 끌어다 놓았다. 집회에 모인 대중 앞에서 ‘제트기’ 자세를 한채 얻어맞았는데, 류사오치의 어린 자식들은 부모가 맞는 것을 억지로 지켜보아야 했다. 1968년 당은 류사오치에 대한 영구추방을 승인한다. 1969년 베이징에서 하남 개봉으로 이송되었는데 벌거벗겨진채 군용담요에 말려서 들것에 실려왔다. 한 때 중국의 국가 수반이던 인물이 짐짝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후 콘크리트 창고에 감금되었는데, 결국 폐렴이 생겼고 고열과 구토가 끊이지 않았다. 담당 의료진들은 당이 숙청한 인물을 돌보는게 두려웠는지 제대로 된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 류사오치는 1969년 11월 사망한다. 향년 71세. 다른 지방으로 추방된 상태였던 그의 부인과 자식들은 사망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Cultural Revolution 63290681_glizhensheng.jpg문혁으로 박해받은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라오서는 항일 경력이 있는 문학작가였다. 중국 하층민의 애환을 묘사한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서방 세계에도 문명이 있었던 그는 당시 67세 였다. 10대 후반이던 베이징 제2, 12, 23, 63 중학교(중고교에 해당)학생들과 중앙예술학원 학생들은 이 노작가를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구타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라오서는 홍위병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이들이 씌운 ‘흑색 우파분자’, ‘괴물’, ‘반동학자’라는 표찰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하지만 그 바람에 더욱 심하게 맞았을 뿐이다. 다음날 그는 더성먼(德勝門) 근처 타이핑 호수에 투신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식 뻘의 홍위병들에게 박해 당한 많은 혁명 원로와 지식인들과는 반대로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는 도를 넘어갔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축하하는 집회가 열렸다. 광장 안에는 100만명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모였다. 그들은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노래인 ‘동방홍’을 부르면서 오래 기다린 끝에 비치는 햇살과 함께 등장한 그들의 최고사령관을 맞이하였다. 접견대에 선 마오를 바라보며 젊은 홍위병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공산주의의 대중집회는 신격화된 마오쩌둥을 위한 종교집회와 다름없었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큰 난리를 일으켜 큰 다스림을 얻는다는 대란대치(大亂大治)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란까지만 이루어지고 대치는 어디갔는지 모르게 되었다. 특히 공산당 중앙이 두 개로 쪼개져 버렸다. 새롭게 등장한 파벌은 마오의 아내인 장칭을 포함한 네 명의 극렬 좌파 인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사인방'(四人幇)이라 불렸다. 이들은 마오가 띄워놓은 열기에 편승해 정치 구호 위주의 투쟁을 벌였다. 성능이 월등한 외국 선박의 수입을 허가했던 덩샤오핑을 외국 기술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식이다.​ 하지만 사인방은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에 기반이 없었고 문혁동안 많은 군출신 원로를 숙청한데다, 인민 생활의 향상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군부와 대중의 지지 없이 마오쩌둥에게만 의지해 권력을 유지했는데, 결국 마오 사후 원로 군부파의 당부주석 예젠잉이 주도한 숙청 계획에 걸려들어 모두 체포된다. 이후 예젠잉이 지지한 덩샤오핑이 복권되어 중앙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문화대혁명에 대한 당의 공식 평가가 이때 확정된다.

문화대혁명의 공과를 논하는 것은 대다수 인민에게 신격화 되어있는 마오쩌둥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라 아주 민감한 사안이었다. 말하자면 열렬한 이슬람교 신자들 앞에서 “선지자 마호메트도 무언가 어쩌면 아마도 잘못한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운을 띄우는 격이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이를 지혜롭게 처리한다.​

여전히 마오가 일으킨 문혁을 지지하던 화궈펑을 중심으로 한 파벌은 “마오 주석의 지시라면 우리는 모두 시종일관 변함없이 따라야 한다” 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덩은 마오 역시 옹호했던 실사구시 정신에 따라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实践是检验真理的唯一标准)” 라고 주장했다. 실천을 통해 옳음이 입증된 정책을 추구해야 하는데 문혁은 그렇지 못했으므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공식적으로 채택된 당 보고서의 주요 내용이다.

문혁의 좌편향의 과오, 그리고 이러한 과오가 거대한 규모로 장기간 지속된 것에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 동지에게 있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잘못된 지도하에서 행해졌으며, 이것은 다시 린뱌오 및 장칭 등의 반동세력 등에게 포섭되어 당과 인민에 수많은 재난과 혼란을 범했다. 마오쩌둥 동지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전략가, 이론가이다. 그는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에서 중대한 과오를 범했지만, 그의 전생애를 보면 중국혁명에 대한 공적은 과오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공적이 제1주의적이고, 과오는 제2주의적이다.

덩샤오핑은 문혁을 부정하면서도 마오쩌둥의 과(過)를 넘어선 공(功)을 인정함으로, 그를 숭배하는 대중의 지지도 잃지 않는 현명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