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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영원한 총리

주은래 II.jpg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중국의 초대 총리로서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총리의 자리에 있었다. 유교식 전통교육과 서양식 교육을 같이 받았던 그는 명목상 공산주의 혁명가지만 실제적으로는 황제나 다름 없던 마오쩌둥의 충성스러운 재상 역할을 했다.

중국 국가 주석이던 마오쩌둥은 대중을 동원하는 급진적이고 정치 우선적인 정책을 선호하여 ‘대약진운동’ 이나 ‘문화대혁명’ 등을 일으켰다. 운동에 동원된 대중들은 종교와 같은 사상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고 그걸 실행하는 수단은 너무 폭력적이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실용적이고 완급을 조절하는 정책을 추구했으며 그 때문에 마오쩌둥으로부터 대중운동의 잠재력을 믿지 않는 인물로 경계를 받았다. 그래도 저우언라이는 자기 능력 하에서 폭력으로 숙청되는 옛 공산당 동지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덩샤오핑이었다.

마오쩌둥은 총리가 비록 자신의 정책에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않지만 결국 온건 노선을 버리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를 후계자로 고려하지 않았다. 마오가 말년에 공식 후계자로 삼았던 인물은 중공 개국 십대 원수중 한 명인 린뱌오(林彪;임표)였다. 린뱌오는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야전사전관으로서 나이는 십대 원수중 가장 어렸지만 서열은 홍군의 창건자 주더와 한국전쟁에서 중공군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의 뒤를 이은 세 번째였다.

​장제스과 마오쩌둥의 초한지(楚漢志)였던 국공내전의 승부를 결정지었던 3대 전역(戰役)이 있었다. 린뱌오는 이 중 두 개인 랴오선(遼瀋) 전역과 핑진(平津) 전역을 승리로 이끌었다. 랴오선 전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남긴 공업 시설이 밀집된 전략적 요충지인 만주 전체를 손에 넣었고 핑진 전역에서는 텐진에 이어 수도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나머지 하나인 화이하이(淮海) 전역을 지휘했던 건 류보청(劉伯承)과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린뱌오는 인민해방군내 기반도 있고 주석의 신임도 있어 후계자로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대약진운동에서도 문화대혁명에서도 마오쩌둥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고, 개인 숭배 운동에도 열을 올리던 그는 하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린뱌오 파벌은 국가주석직의 승계를 두고 조바심을 드러내면서 마오쩌둥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다. 숙청 움직임에 위기를 느낀 이들은 반란 계획을 세워보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군용기를 타고 급히 소련 방면으로 도주한다. 하지만 비행기가 몽골의 초원에 추락하는 바람에 린뱌오와 그의 처, 아들을 포함한 일당 전원이 폭사했다. 숙청 위험에 처하자 마오쩌둥을 제거하려는 모험을 한 린뱌오와 저우언라이는 잘 대비가 된다. 최후의 만다린(Mandarin;궁정관료)이라고 불렸던 저우는 늘 마오쩌둥에게 순종적이었고 유교시대 군주를 대하듯 그를 극진히 보좌했다.

마오쩌둥의 허무한 후계자였던 린뱌오가 사라지고 나서 중공의 정치국 세력은 둘로 나뉘었다. 문화혁명을 적극 지지하는 마오의 아내 장칭(江靑;강청)을 중심으로한 사인방(四人帮) 세력과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및 혁명원로들로 이루어진 실무파 세력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두 세력을 번갈아 지지하면서 양측이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저우언라이는 사인방으로부터 줄곧 정치적 공격을 받았고 말년엔 방광암 선고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좌우명으로 삼은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1대로 일했다.

총리의 근무 시간은 기록으로 남겨져있다. 1973년 72일간을 병상에서 보냈지만 병상에서도 비서들을 불러 매일 집무를 한다. 다시 병원에 입원하기 전 기간인 1974년 1월에서 5월까지 총 139일 동안 12~14시간 일한 날이 9일, 14∼18시간이 74일, 19~23시간이 38일, 24시간 꼬박 세운 날은 5일, 근무시간이 12시간 이내인 날은 단 13일 이었다. 정신력과 사명감 없이는 결코 견디지 못할 일정들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몸은 1975년 가을부터 대소 10회의 수술을 받으며 급속하게 쇠약해졌다. 그해 12월 저우언라이는 문병 온 당부주석겸 국방상이었던 예젠잉(葉劍英;엽검영)에게 암성 통증을 참으며 “권력이 그들(사인방)의 손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고 말한다. 그는 자신과 마오쩌둥 사후에 벌어질 권력 투쟁을 걱정하고 하고 있었다. 이듬해 1월 8일 저우언라이는 사망한다. 마오쩌둥의 사망보다 8개월 앞선 시점이었다. 아래는 그의 사망을 기록한 바르바라 바르누앙(Barbara Barnouin)의 책 <저우언라이 평전>의 구절이다.

​1976년 새해 아침 신문들은 마오가 1965년 쓴 시 두 수를 개재했다. 저우는 마오에 대한 그의 마지막 충성을 보이듯 그의 보좌관들에게 그 시를 읽어달라고 했다. 그 후 저우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1월 5일 저우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틀 뒤인 밤 11시 마지막으로 깨어났다. 저우는 눈을 떠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의사들에게 희미하게 말하기를, 그들이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으니 그들을 필요로 하는 다른 환자들을 돌보라고 말했다. 이것이 저우의 마지막 말이었다. 저우는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에 사망했다. 향년 78세.

다음은 저우언라이의 사망에 대한 당의 보고를 듣는 마오쩌둥의 모습이다. 일본 산케이 신문 발행의 <모택동 비록> 책에서 옮겼다.

​저우언라이 사망에 관한 당 정치국의 정식 보고서는 오후 3시가 지날 무렵, 폐와 심장을 앓아 누워 있던 마오쩌둥에게 전달되었다. 당직 간호원은 그것을 천천히 읽었다. “위대한 프롤레탈리아 혁명가이며 걸출한 공산주의 전사인 저우언라이 동지는 암을 앓아 치료한 보람도 없이 1976년—” 마오쩌둥의 감겨진 눈으로부터 눈물이 흘러나와 빰을 적셨다.

사인방이 장악한 인민일보등의 언론매체들은 죽은 정적 저우언라이를 찬양하는 보도를 억제했다. 하지만 대중은 자발적으로 추모를 위해 나왔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한지 3개월이 지난 1976년 4월 4일의 청명절(淸明節,죽은 사람을 기리는 명절)날 추모는 절정에 달했다.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중심의 38m 높이의 인민영웅기념탑에는 주은래의 거대한 초상화가 설치되었고 무수한 꽃 장식으로 주위 대좌가 파묻혔다. 초상화 밑에는 검정색 바탕에 흰 글자로 “우리들은 밤낮 경애하는 저우 총리를 생각합니다” 라고 쓰여진 플래카드가 있었다. 이날 천안문 광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20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하지만 사인방 세력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고 그 반대파인 자신들을 비판하는 이 집회를 강제 해산해 버린다. 집회의 배후로 몰렸던 덩샤오핑은 일생에서 세 번째 실각을 당해 쫓겨난다. 이로부터 몇 개월 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문화대혁명의 지속을 외치는 사인방 파벌과 예젠잉을 중심으로 한 혁명 원로 파벌간의 피할 수 없는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던 예젠잉은 마오가 생전에 지명한 마지막 후계자 화궈펑(華國鋒;화국봉)과 연합했다. 이들은 대중적 인기가 떨어지고 민병 밖에 동원할 수 없던 사인방 – 장칭(江靑),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 을 하루 사이에 모두 체포해버린다. 사인방의 몰락은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는 당내 세력의 종말이 되었고, 덩샤오핑이 복귀할 길도 열리게 된다.

인민해방군에 기반이 없고 파워 게임에 서툴었던 화궈펑은 복귀한 덩샤오핑에 의해 쉽게 제거되었다. 결국 저우언라이가 죽기 전 예젠잉에게 당부한대로 권력은 사인방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따라 개혁정책을 펼칠 덩샤오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Notes:

  1.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중의 구절. 삼가 공경스럽게 몸(躬)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할지니, 다만 죽은 후에나 그칠 것입니다 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