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세 V – 아이스크림 트럭
이승복 어린이 반공 영화를 본 것은 오래 지속되는 영향을 낳았다. 정인은 잔인한 살인마를 그렇게 생생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비가 출몰하는 산골 지역과는 상관없는 수도권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정인은 밤 마다 공비가 집에 들어오지 않을까 무서워했다.
훗날 다 큰 정인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라는 미국 잡지를 읽다가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했다. 부모는 아이가 하는 흔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라는 글이었다. 한 질문은 이랬다. 아이가 영화에서 본 괴물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부모는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까요? 답은 “아빠 엄마는 이 비싼 집을 공들여 가꾸고 있단다. 여기에 괴물 같은 게 들어오게 하지는 않을꺼야” 였다. 정인은 아이들은 별별 질문을 다 하는구나 게다가 답변도 설득력있지는 않은데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자신도 아이 시절 공산당 공비가 집에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 생각은 다른 것 하나도 떠올리게 했다.
정인이 보았던 ‘싸이코'(Psycho)라는 영화에 대한 기억이었다. 옛날 영화여서 요란하지 않고 조용한 편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무서운 건 더 했다. 여기엔 죽은 엄마를 대신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싸이코 남자가 나온다. 그는 백골의 시체가 된 엄마를 고운 옷을 입힌 채 잘 앉혀둔다. 가장 무서웠던 건 샤워실에 들어가 기분좋게 샤워하던 여자를 싸이코가 찔러 죽이는 장면이었다. 어린 정인은 옷을 벗고 목욕하고 있을 때 공비가 들어오지 않을까 무척 두려워 했었다. 발가벗은 채로 칼에 난도질 당해 죽는 상상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던가! 정인은 아이 시절 이미 가장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훗날 그는 이 영화가 인간이 태생 때 부터 가지는 공포의 원형을 형상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민학생이었던 정인은 목소리도 맑고 야한 생각도 안 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성적 에너지는 모양을 바꾸어서 이상한 전기자극을 흘려주고 있었다.
이제까지 말했던 공포나 강박, 유혹은 기억이 처음 기억이 되던 시절 정인의 마음 안에 새겨졌다. 그리고 국민학생 3학년 정인은 유희에 대한 자신의 기호를 처음 확립하기 시작한다. 그건 즐거움에 대한 욕구가 탄압에 대한 반대급부로 생겼기 때문이다. 정인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공부를 시키고 언제나 정인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바빠서 밤 늦게 들어왔다. 방에서 나와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라고 인사하고 다시 방에 들어가는 게 아버지와의 접촉의 정례이자 전부였다. 아버지는 항상 어떤 일에 몰두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주말에는 집에서 죽은 듯이 널부러져 잠만 잤다. 마치 몸이 쇠이고 바닥이 자석인 것 처럼 누워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나중에 커서 전쟁 같은 직장 생활에 대해 알게 된후 어린시절 아빠가 보여준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무튼 정인에게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달려가 안길 사람은 아니었다.
정인이 달려가 안기고 싶은 대상은 모두 일본에서 건너온 것들이었다. 오락실과 일본 만화책은 낙원 같은 행복을 이 꼬마에게 주었다. 정인은 국가적인 반일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죄책감이 들었다. 원수에게서 맛있는 꿀을 선물 받아 먹는 사람의 심정이었을까? 하지만 죄책감도 점점 희미해졌는데, 꿀은 일등품이었고, 원수가 진짜 원수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인은 고정 도덕을 뒤집을 것을 결심한다. 반일감정을 즐거움에 대한 탄압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미 부모님으로부터 비슷한 탄압을 받는다고 느끼고 있었으므로 권위가 있는 존재는 즐거움의 방해자라고 정의되었다. 이렇게 보면 부모님도 학교도 국가도 모두 억압자 연합이었다. 그들은 항상 옳은 걸 강요하지만 정인이 뭘 재미있어 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공부 안 하면 답답하다고 소리치며 두들겨 패려고 할 뿐. 반면 ‘해야 한다고 하는 것들’ 만 우글우글 있는 학교 담장을 넘으면 즐거움의 보금자리에 갈 수 있었다.
담장 너머에서는 사람이 설탕더미로 변해갔다. 어느 미남 청년 사장이 몰고 다니는 아이스크림 트럭 에는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냉동 트럭 안에 들어가 무더기로 쌓인 아이스크림을 같이 핥아 먹었다. 그렇게 계속 핥다 보니 아이들은 어느새 사람이 아닌 아이스크림으로 변해 버렸다. 끝없이 떠도는 서커스단이 동네로 찾아오기도 했다. 단원 중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서커스 단이 공연을 열면 이 예쁜 소녀를 뺀 다른 단원들은 모두 묘기를 부리다 사고로 죽었다. 단장은 소녀를 유혹의 미끼로 사용해서 관객들을 단원으로 불러 모은다. 이 이상한 서커스단은 이렇게 영원히 동네를 돌아다녔다. 이런 환상의 세계를 정인은 살고 있었지만 어른들은 물론 거기에 관심이 없었다.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V – 운명의 주인
고난과 시련이란 이름의 마차를 타고
폭풍 이는 벌판 위에 영원히 피어나라
Wake up, my queen 첫 눈물의 여왕이여
Now arise, my queen 운명의 주인이여
너 홀로 의지의 배를 타고 내게로 오라
이 영겁의 고독에서 몸부림치는
날 구해다오
넥스트(N.EX.T)의 ‘사탄의 신부(新婦)’ 라는 곡의 가사이다. 이제 고인이 된 신해철님은 철학과 출신 답게 실존주의 분위기의 가사를 자주 썼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운명의 주인이여’ 라는 부분에서 항상 감동을 받았다. 운명의 주인 이라는 말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된다는 것과 비슷한 뜻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니체 해설서를 많이 쓴 고병권 작가님의 책 구절을 읽어보자.
우리가 니체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동정을 받아야 할 쪽은 우리들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생애의 대부분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왜 만들어 놓은지도 모르는 가치와 규범에 복종하고, 미리 정해져 있던 길을 따라 의미없는 생을 이어간다면 그 생은 죽음보다도 비참한 게 아닐까. 그러나 니체는 적어도 자기 삶의 많은 순간들에서 주인이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했다. 스스로를 돌이켜 봤을 때, 인생의 처음 20년 정도는 외부에서 정해놓은 가치와 규범에 복종했던 삶이었다. 너무 당연한거라 느끼고 의식도 못하고 있었지만 삶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중산층으로 태어나 학벌을 만들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하지만 그렇게 정해진 생을 사는 건 결국 허무의 문제를 불러온다.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필요가 있다. 운명의 주인 이라는 말에는 우선 자기 운명은 멋진 것이라는 함의가 있고, 또 그것의 주인은 오직 자신 뿐이라는 자신감도 담겨있다. 내 운명은 거지같이 살다가 거지같이 죽는거야 라고 믿는 운명의 주인은 없다. 그렇다면 니체 자신이 생각한 운명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저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읽으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나의 운명을 안다. 언젠가는 나의 이름에는 엄청난 사실이 추억으로 연상이 될 것이다. 즉 세상에서 전대미문의 대 위기와 가장 심원한 양심의 갈등, 그리고 이제까지 신뢰되고 요구되었으며, 신성시되었던 모든 것에 거역하여 만들어졌던 결정에 대한 추억 말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처럼 스스로를 새 시대의 사상적 구원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2천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거나 그마저 넘어서는. 그래서 앞으로도 기독교계로부터는 영원히 욕을 먹을 것 같다. 니체는 이렇게 거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과는 지구와 별처럼 떨어진 사색을 했다. 따라서 그의 책을 이해하려면 그의 입장을 상상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처음 읽으면 횡설수설로 들리는 니체의 저작들은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들에게 니체는 정신을 해방시키는 종교의 교주였다.
너는 너 자신의 주인, 또한 네 덕성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예전에는 덕성이 너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도구일 뿐이다. 너는 자신의 의사 결정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네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는 모든 가치 판단을 할 때 미래를 지향하고 고려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많은 깨달음을 주는 니체의 말이다. 덕성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정해놓은 것이다. 우리나라 상황을 예로 들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 등이다. 당연하게 정해져 있어서 실제로 옳은지 생각도 안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절실히 깨닫은 목표의식이 없다면 그건 노예의 덕성이다. 왜 공부하는지, 왜 일하는지, 왜 이념을 수호해야 하는지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한다면 결국 허무의 문제가 찾아온다. 높은 목표를 찾으면 노예의 덕성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예전에는 강박이고 피로를 주던 덕성이 이제는 필요할 때 쓰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그 목표의식은 자신의 운명을 찾았을 때만 충족된다.
세키가하라 전투 II – 이에야스의 책략
메이지유신 성공 후 일본의 신정부는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전쟁인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육군의 편제와 전술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래서 독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을 군사고문으로 초빙했는데 일본인들은 메켈에게 결과를 알리지 않은 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양군의 병력 포진도를 보여주었다. 메켈은 서군의 승리를 장담했다.
하지만 실제 전투의 결과는 한 나절도 버티지 못한 서군의 참패였다. 서군의 주요 다이묘였던 이시다 미쓰나리, 오타니 요시쓰구,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3만 3천여명 군대는 전투에서 괴멸, 와해되었다.
전투 시작 당시 서군 측의 미쓰나리는 사사오 산(笹尾山)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덴만 산(天満山),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마쓰오 산(松尾山)에 각각 포진했다. 게다가 총대장을 맡은 모리 가문을 대표해서 참전한 모리 히데모토는 전선 후방의 난구 산(南宮山)에 주둔해서 동군의 퇴로를 끊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동군의 총 대장 이에야스는 산 아래 좁은 분지에 학익진(鶴翼の陣) 형태로 포위된 진세를 상관치 않고 전투를 시작한다. 외교 책략으로 이미 모리와 고바야카와의 배신을 확정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리 데루모토는 석고 120만석으로 서부 일본의 최대 다이묘이자 히데요시 정권하 다섯 유력 다이묘의 모임인 고다이로(五大老,오대로)의 일원이었다. 데루모토는 서군의 총 대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전쟁에 대한 모리 가문내의 의견이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했다. 결국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지도 않고 오사카 성에서 후계자 히데요리를 보호하며 자중하고 있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의 조카였던 인연으로 추코쿠의 다이묘였던 고바야카와가의 양자로 들어간 인물이다. 서군 내에서 주력군을 이루는 약 1만2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그는 전투 전 이미 이에야스측과 내통한 상태였다. 결전 초기 서군에 우세한 전세가 펼쳐지자 사태를 방관하며 그대로 산 위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초조해진 이에야스 측의 위협 사격을 당했고, 결국 아군의 허리를 찌르는 결정적인 배신을 감행한다.
서군의 실질적인 총수 이시다 미쓰나리는 동군과 대등한 병력을 집결시켜서 유리한 위치에 포진시켰지만 전군을 일사 분란하게 지휘할 수가 없었다. 서군을 대표할 직위도 없었고 이에야스처럼 자기 영지에서 대군의 중추가 될 병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히데요리가 장성한 성인이어서 전쟁터에 참전할 수 있었다면 그 상징성 때문에 싸움의 양상 자체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 밖을 나가본적도 없던 8세의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크기 전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동분서주했다.
이에야스는 영지에서 약 7만명의 하타모토(旗本;はたもと;다이묘직계군사)를 동원했고 이중 반을 세키가하라에 투입했다. 그리고 전쟁 전 외교 책략으로 서군을 분열시켜 놓았다. 결국 전투를 방관한 모리 군과 전투 중에 창 끝을 돌린 고바야카와 군으로 인해 세키가하라의 승부는 결정되었다. 클레멘스 메켈 같은 전문 군인이 금방 예측했던 포진 상의 우위를 정치적 책략으로 무력화시킨 이에야스의 승리였다.
세키가하라 전투 I – 천하를 가르는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는 서기 1600년 음력 9월 15일에 미노 국 세키가하라(현 기후 현 후와군 세키가하라마치)에서 벌어진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결전이다. 천하를 가르는 전투(天下分け目の戰い; 텐카와케메노 타타카이)로 불리는 이 결전에서 일본 전국의 다이묘(봉건 영주)들이 두 패로 나뉘어 싸웠다. 한 편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신 이시다 미쓰나리가 지휘했던 서군이었고, 다른 편은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노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었다. 양측에서 각각 약 10만의 병력을 동원해 결전을 벌였지만 전투는 불과 한 나절 만에 끝난다.
타이코라는 직위로 일본 전국을 통치하던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그를 이은 건 불과 6세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였다. 전국 최대의 다이묘로 약 255만석의 석고를 가지고 있던 1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빼앗으려는 야심을 품는다. 히데요시는 죽으면서 나름의 안전장치를 강구해두었었다. 고다이로(五大老;오대로)와 고부교(五奉行,오봉행) 조직이 그것이다. 고다이로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다섯 명의 대 다이묘 연합체였다. 유력 다이묘들이 세력 균형을 이뤄 히데요리의 권력이 침범받는 일이 없도록 했다. 고부교는 도요토미 정권에서 행정의 실권을 쥐었던 다섯 명의 관료 연합체이다. 현대 정부로 치면 주요 장관 모임과 비슷하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고부교의 일원이었다.
히데요시는 고다이로들이 서로 견제하고, 고부교는 자신이 남긴 행정 지침에 따라 유력 다이묘들을 제한하는 체제를 구상했다. 하지만 문제는 고다이로의 수장 격인 이에야스의 힘이 너무 거대하다는데 있었다. 이에야스는 부교들의 행정 권한을 무력화하면서 자신을 거역하는 다른 다이묘들을 토벌하려 했다. 물론 이에야스는 속마음을 감추고 어린 후계자인 히데요리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는 거라고 선전했다. 이에 미쓰나리는 불과 19만석의 소 다이묘였지만 도요토미가에 대한 충성을 기치로 반 이에야스 세력을 결집시킨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그동안 수많은 문학과 영상 작품을 통해 다루어졌다. 그중 시바 료타로作 동명 소설인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상과 안위, 세력과 세력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 군상을 흥미롭게 묘사해 놓은 작품이다. 아래는 감명깊이 읽었던 소설 속 장면이다. 미쓰나리의 맹우인 오타니 요시쓰구는 히데요시의 촉망받는 부하였지만, 문둥병에 걸려 시력을 잃은 후 반 은거상태에 있었다. 그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친구 미쓰나리를 위해 서군 측에 가담하여 싸운다. 한 때 호각을 이루던 전세가 아군측 다이묘의 배반이 속출하여 완전히 기울어졌을때 전쟁터에서 할복 자살함으로써 장렬한 생애를 마친다.
“슬슬 배를 가르겠네.” 요시쓰구가 이렇게 중얼거렸을 때 측근 30명 정도가 마지막 돌격을 건의했다.
“쓸데없는 일, 각자 알아서 자신의 목숨을 건사하게나.” 요시쓰구는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긴고 주나곤 향해 원한의 창을 겨누고 기쁜 마음으로 죽고 싶습니다.” 하며 달려나가 시작했다.
요시쓰구는 큰 소리로 그들을 불러 세우더니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가려거든 가게나. 그런데 그대들도 알다시피 나는 소경이네. 그대들의 분전을 볼 수가 없어. 그러니 달려나가는 자들은 한 명씩 내 앞에 와서 이름을 말하도록.”
다들 요시쓰구의 가마 앞으로 말을 타고 나와 자기 이름을 댔다. 요시쓰구가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주면 그들은 목례를 하고 적군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고작 5만석의 낮은 신분이었지만 요시쓰구는 무사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Notes:
- 도요토미가의 석고는 그보다 적은 약 220만석이었다. ↩
행복의 정복 I – 수학이 재미있어서 자살 안 했던
책의 제목은 ‘행복의 정복’. 지구상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 하고 있다. 월급보다 큰 돈을 들여 여행을 떠나고, 우울증에 약을 먹거나, 술 담배 마약을 취미로 삼고, 목숨걸은 불륜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저자는 행복을 정복한다고 말하고 있다. 딱 자기 기준으로 상담해주는 사람에게 많이 속아보았다면, 혹은 우울에 푹 잠겨있는 사람이라면 제목을 본 순간 냉소할 것 같다.
나 역시 이해심 없는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아 본 적이 있다. 내가 느끼는 고난을 자세히 말해도, 말은 벽에 던진 배구공이 튕겨 나오듯 그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오는 것 같았다.
상대를 판단한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의 차이는 상대에게 애정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대화를 아무리 나누어도 다른 사람에게 위안을 주지 못한다. 반면 자신을 사랑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위안을 널리 퍼트릴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1872년 영국의 명문 백작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디프테리아 감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2년 뒤에는 우울증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기관지염 합병으로 사망한다. 이후 러셀은 조부모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친할아버지 존 러셀은 1878년 세상을 떠났는데, 러셀은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탄 친절한 늙은 신사로 기억했다.
러셀은 공교육에 반대한 할머니 덕분에 집안에서 가정교사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19세기 후반 사상 혁명기에 엘리트 교육을 받는 장점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대인공포증도 키워준다(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니). 백작 할머니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으나, 종교 이외의 부분에서는 진보적이었고 손자에게 사회적 정의에 대한 시각을 심어준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성서 출애굽기의 구절(23:2)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는 러셀의 좌우명도 되었다.
러셀의 사춘기는 굉장히 고독했으며, 몇 차례 자살 충동까지 느꼈다고 회고했다.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수학이 재미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종합하면 영국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양친은 빨리 죽고, 대인공포증과 우울증이 생겼지만 수학 공부하고 싶어서 자살 안 한 특이한 유년기이다. 아픔을 딛고 일어나 훗날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철학자, 수학자, 사회 개혁가가 되고 노벨상 까지 타게 되는 걸 보면 인간 마음의 노력은 정말 많은 걸 가능케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우울 속에서 투쟁하며 행복을 쟁취했다. 너무 우울하면 다른 좋은 사상을 느끼고 이해할 머리도 없어지고, 지쳐서 잠만 자고 싶어진다. 거꾸로 말하면 밝은 마음으로 공부하고, 잠만 자는 게 아니라 즐거운 일에 몰두한다면 행복해진다는 뜻이다. 행복은 분명히 그 길 안에 있고, 사람을 그리로 이끄는 것은 노력과 운명이다. 러셀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심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 길로 들어섰다. 그가 빠져있었던 심리적 소용돌이와 극복 방법들은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서술은 과장되어 있지 않고, 어떤 유형의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지도 않으며, 따뜻한 휴머니즘에 기반해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나니 제목이 전혀 거만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모사세 IV – 이승복 어린이 사건
아무튼 정인은 그때 몰랐다. 자꾸 꾸지람을 듣고 사랑 받지 못하는 게 싫으면 사랑을 더 요구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스무 살이 넘어 여자친구를 사귀고 나서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이들의 운명은 완전한 운에 맡겨져 있었다. 세상에 던져진 후에 만나는 부모가 자기를 사랑해 줄지 안 사랑해 줄지는 행운에 따른다. 엄마 아빠가 쌓아놓은 업(業)에 따라 아이는 광대가 되기도 하고 묘기 부리는 동물 아니면 서커스 단장으로 성공도 한다. 하얗고 티 없는 피부에 히스테리가 들어와 아이들은 일찍이도 작은 악마로 변해 간다.
정인의 유년에 결정적인 ‘공포’ 를 심어 주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건 ‘이승복 어린이 사건’ 이다. 국민학교 2학년 때 학교 강당에 학년 전체가 모여 이승복 어린이 영화를 보았었다. 정인은 영화의 소재가 된 사건을 미리 들어 알고 있었고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공비는 이승복 어린이의 입을 찢어서 죽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알 수 없는 공포감이 강당을 뒤덮고 있었다. 영화는 강원도 산골의 어느 아름다운 마을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밝은 햇살도 초록색 나무로 덮인 산골짜기도 다른 아름다운 풍경도 마지막 살인사건을 위한 무대장치가 되었다. 영화 초반부는 공산당 공비들이 얼마나 평화롭고 좋은 마을을 살육의 공포에 빠뜨렸는지를 웅변해주고 있었다. 운동회를 맞아 운동장에는 이승복 어린이네 학교 아이들이 하하호호 뛰어 놀고 있다. 이승복 어린이가 나무에 올라가는데 뒤따라 올라오던 어린이가 실수로 반바지를 잡아 당기는 바람에 그의 둥그런 엉덩이가 다 드러났다. 보통 때면 깔깔 웃는 장면이었지만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정인은 어린 나이에 이미 공포 영화가 감정적으로 대비되는 장면을 차례로 보여줌으로써 극한의 공포를 끌어낸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나 보다.
매우 험상 굳게 생긴 공산당 공비들은 어두운 밤을 타서 산골짜기 마을로 침입한다. 그리고 드디어 이승복 어린이 가족의 집에 초대도 받지 않고 난입한다. 처음부터 죽이러 들어간 건 아니어서 가족들과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눈다. 이승복 어린이가 공비 살인마의 심기를 거스른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공비가 승복 어린이의 연필을 보더니 “이거 미제 맞지?” 라고 말한 것을 어린이가 “아니에요. 이건 국산이에요” 라고 대답한 게 시초였다. 공비는 이렇게 좋은 연필을 남한이 만들었을리 없다고 말하며 흥분한다. 하지만 이승복 어린이는 물러서지 않았고 급기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는 치명적인 말을 하고 만다.
정인은 입 안에 새빨간 피가 가득 찬 채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던 이승복 어린이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했다. 북한군은 말 한마디 잘못 뱉은 아이의 입술 양쪽에 엄지 손가락을 걸고 찢어 숨통을 끊었다. 북한군은 악마를 넘어선 존재였다. 악마도 색깔은 까맣고 꼬리가 갈라져 귀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새빨간 피가 새하얗게 될 수 없듯이 북한군은 결코 좋은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악마를 능가하는 악마, 악마를 연쇄 살인으로 죽이는 악마였다!
정인이 경악에 찬 채 어두운 강당을 나와서 주위의 아이들을 살펴보니 다들 눈이 벌개져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이들이 우는 게 방금 본 공포 영화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죽은 이승복 어린이가 불쌍해서 그러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