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I – 니체와 프로이트와 융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성격이 극단적인 사람들이 대조를 이루며 많이 등장한다. 창녀로 일하지만 아주 순수하고 따뜻하면서 의지도 강한 사람(‘죄와 벌’의 소냐), 열등감과 폭력성이 뒤섞여 음산해 보이는 사람(‘까라마조프의 형제’의 스메르쟈꼬프), 겉으로는 깔끔한 신사지만 성욕이 충만하고 태연히 살인을 하는 사람(‘죄와 벌’ 스비드리가일로프) 등등. 도스예프스키는 사람의 마음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인격(기독교적으로 보면 천사와 악마)를 몇 개 극단적인 분신으로 분리해 작품 주인공으로 만든 것 같다.
신이 죽었다고 하는 니체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서로 안 어울려 보이지만 둘 다 뛰어난 심리 탐구자인 건 같았다.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심리학자였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니체는 소용돌이치는 공포, 불안, 열등감, 애정 같은 마음의 물결을 물리학자가 역학을 분석하듯 분석해냈다. 프로이트와의 융의 정신분석학이 시작도 되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 세상에 나왔는데, 읽어 보면 니체가 이미 자아와 에고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자아는 항상 듣고 항상 살펴봐.
자아는 비교하고 억제하고 정복하고 파괴하지.
자아는 지배해. 에고 역시 자아의 지배를 받지.
형제들! 자네의 생각과 느낌 뒤편에는
뛰어난 사령관, 숨겨진 현자가 버티고 있어.
이 사령관, 이 현자가 바로 자아라고 불려.
자아는 자네 몸 안에 살아.
자아가 바로 자네 몸이야.
자네 몸에는 자네 머리로 짜내는 어떤 지혜보다
더 뛰어난 이성이 존재하지.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에서 이드-에고-슈퍼에고 로 이어지는 상하 구조를 고안해냈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 – 중재자 – 고차원적 도덕으로 높이를 나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위행위를 죄로 보는 것 같은 보수적이고 계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반면 융은 좀더 낭만주의적이었는데, 정신을 같은 층위에 있는 다른 개성을 지닌 원형(元型, Archetype)들로 파악했다. 상기 인용구에 나오는 ‘자아’ 는 초월적 지혜를 가진 존재로 융의 늙은 현자 원형과 같은 말이다.
니체는 마음의 구조과 운동을 분석하고서 결론을 내렸다. 정신의 내적 본질은 반드시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충동’ 이고 또한 어둡고 다이나믹한 욕망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지성에 의해서 변질되지 않은 그것(번개, 폭풍우, 우박)들, 즉 순수한 의지는 얼마나 행복하고 힘찬 것인가!” 라고 썼다.
번개나 비바람 같은 사물은 망설임이나 고민 없이 단순에, 화살처럼 날아가는 정신을 표현한다. 이렇듯 욕망이나 사랑, 집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의 모든 에너지를 자기 운명을 이루는 데 쓴 것이 차라투스트라이다. 이런 집중은 인간에게 자아가 전 세상을 덮고 있는 것 같은 초월감을 준다. 초인(超人,Ubermensch)은 겉모양이 펑하고 바뀌어서 되는게 아니라, 정신이 탈피하는 것이고 의식 과정이 변해서 무한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한 대로 새가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나는 것과 같다. 헤세나 융, 카잔차키스 같은 이들은 저서에서 니체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현했는데, 그의 사상이 정신에 날개를 달아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주는 재생과 부활을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 – 춤추는 신
차라투스트라는 십 년 동안이나 세상을 떠나 산 위에서 생활했다. 아무리 애완동물(?)인 독수리와 뱀이 있다 해도 너무 쓸쓸한 생활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썩은 도사는 아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마침내 엄청난 깨달음의 영역에 들어서고야 말았다. 불교 기준으로 보면 ‘열반’이나 ‘해탈’의 경지에 들어갔다. 역자의 설명으로 보면 개인의 자유를 막는 무지와 편견을 넘어서 무한한 자유를 느꼈으며, ‘나다운 존재’ 즉 초인이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 정신의 분신으로 표현되었는데,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뭘 깨달았는지 알아보려면 먼저 니체 인생의 궤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니체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친할어버지 모두 목사였고, 어머니 또한 목사의 딸이었다. 니체의 아버지는 니체가 4살이 되던 해에 뇌질환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한다. 20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자식들을 위해 재혼하지 않고 가정을 꾸려나가기로 결정한다. 니체의 가정에는 아들 니체를 빼면 모두 여자만 남게 되었는데, 할머니, 어머니, 미혼의 고모 두 명 그리고 여동생이었다. 이렇게 니체는 기억이 시작되는 나이 때 부터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한다. 어머니 프란치스카(Franziska)의 아들에 대한 기대와 염원은 대단했다. 게다가 여동생 엘리자베트(Elisabeth)도 니체에게 단순한 친 오라버니 이상의 감정을 품었던 모양이다. 이 두 여성은 모두 니체가 기독교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바랬다. 니체는 이런 염원에 적응하는듯 하다가 말년에 가서는 넌더리나는 혐오로 반응한다. 아래는 그의 작품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온 구절인데 한 번 읽어보자.
나와 가장 반대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즉 예측할 수 없는 본능적인 저속한 인간을 생각하면, 나의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기꾼들과 내가 친척이라는 것은 나의 신성에 부담이 된다.
작품 속에서 친 어머니와 동생을 이렇게 극딜한 작가는 아무도 못 본것 같다. 아무튼 니체는 솔직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의 어머니 혐오에는 고루한 기독교 교육에 대한 반발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의 깨달음도 신으로부터의 탈출, 독립으로 시작한다. 짜라두짜는 한 때 자신이 생각했던 신의 이미지에 대해서 회상한다. 아주 시적인 음율을 따라서…
그 당시엔 세상은
하나님이 꾸는 꿈, 하나님이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마음이 불편한 하나님이 스스로 위안 받기 위해
자기 눈앞에 뿌린 총천연색 안개라고 생각했지.
<선과 악>, 기쁨과 슬픔, 나와 너…
이런 것들은 창조주가 뿌린 총천연색 안개라고 생각했지.
하나님은 무엇인가 마음이 불편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지.
그래서 세상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지.
고통 받는 존재에게는 잠시 자기 고통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아찔한 즐거움이지.
하나님이 아찔한 즐거움에 취해 자신을 잊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고 생각했어.
이 세상은 영원한 모순이라고,
아니, 그 모순조차 영원토록 불완전하게 보여 주는 이미지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 자신 불완전한 창조주에게는 아찔한 즐거움이라고
나는 한때 생각했지.
짜라두짜가 생각한 창조주는 ‘권태’의 면이 두드러지는 존재이다. 무언가 마음이 불편해서 세상을 만들고, 고통에서 눈을 돌리며 아찔한 즐거움을 느낀다. 창조주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모순의 세상을 창조할 수 밖에 없었다. 짜라두짜는 신의 모습을 비판하고는 자신이 어떻게 신을 뛰어넘었는지를 말한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되었냐고?
고통 받는 존재 짜라두짜는 자신을 넘어섰지.
마음이 타 버려 생긴 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지.
그리고 더 밝은 불꽃을 만든 거야. 무슨 일이 벌어졌겠어?
그 망령은 내게서 도망 가더군!
그들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지.
하지만 그들은 감히 별과 같은 존재가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 거야.
여기서 ‘타 버려 생긴 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참회(懺悔)를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인간은 원죄를 지었으니 뉘우침이 있어야 하고, 그건 절대자에게로 향하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원죄라는 생각이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생생하게 체험될 수 있을까? 적어도 짜라두짜에게는 아니었다.
짜라두짜는 참회의 방법을 쓰지 않고 자신의 불꽃을 만들어서 헛된 망령(망상)을 쫓아냈다. 불꽃이란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열정이나 갈망을 비유한 것이다. 니체는 작품 속에서 줄곧 ‘춤추는 신’ 이나 ‘디오니소스’를 이야기한다. 춤춘다는 건 무아(無我) 속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을, 디오니소스는 고대 그리스의 주신(酒神)으로 역시 도취, 무아, 광기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술에 만취했을 때나, 장중한 음악에 압도되었을 때 빠질 수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자아의 경계가 모두 없어지고 한 없이 자유로워지는 그런 차원에 니체는 관심을 가졌다.
니체는 사람들이 기독교 설교자가 정해놓은 신앙에서 벗어나 ‘춤추는 신’ 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차원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고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고민에 치여 목적도 운명도 잃어버린채 지내고 있다. 실존이 없기 때문에 생이 허무해지고, 쉽고 자극적인 것에만 빠진다.
이런 상황을 탈출하는 것으로 니체가 제시한 방법은 먼저 정신 안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의 역동을 이해해서, 그걸 운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무의식과 전의식을 분석해냈었다. 니체가 말하는 정신의 여정이 어떤 것인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 – 짜라두짜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는지 저렇게 말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오랫동안 괴로웠다. 그렇다고 그냥 읽으면 느껴지듯 헛소리라고 단정할 순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앙드레 지드, 토마스 만, 카를 융 – 모두 한결 같이 니체를 좋아했고 그를 찬양했다.
니체는 24세의 나이에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바젤 대학교’ 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그 정도 천재성이 녹여져 있는데다 낯선 서양 인문고전 지식(그리스 신화, 헤겔과 쇼펜하우어 철학 등등)이 더해져 집필된 Also sprach Zarathustra를 이해하는건 힘들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상이기도 하다. 그가 하는 말에는 삶 전체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건 새장에 갇힌 새를 하늘로 날려보내는 것 같이 큰 힘이다.
오르지 못할 산 같던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는데 큰 짐을 덜어 주었던 책이 ‘박성현’ 님 번역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였다. ‘차라투스트라’ 라는 이름보다 경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짜라두짜’ 는 독일어 원문의 발음 음절과 운율에 맞춘 가장 자연스러운 이름이라고 한다. 계속 읽다보면 더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이름으로 들린다. 먼저 이 책 서문에 나오는 니체의 철학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자.
니체의 철학은 단순 명쾌하다. 그의 화두는 다음 세가지 질문과 답으로 정리된다.
첫째, 개인 실존의 자유는 무엇을 위함인가?
“나다움에 이르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둘째, 진실은 어떤 쓰임새를 가진 것인가?
“진실인가 아닌가에 비추어 현재의 입장, 이해관계, 편견을 넘어설 때 ‘나다운 존재’ 가 될 수 있다. 진실은 ‘나’ 가 ‘나다운 존재’ 가 되기 위해 사용된다.”
셋째, 우리는 왜 ‘나다운 존재’ 가 되기 원하나?
“생명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 원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가 바로 ‘나다운 나’ 이다.”
그의 철학은 위 세가지 화두 때문에 어렵다. 위 세가지 화두를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니체는 야만인, 광인, 깡패로 느껴진다. 또한 니체는 어질어질한 정도의 속도로 건너뛰며 이야기하기 때문에 어렵다. 빛의 속도로 생각을 전개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니체는 절벽, 심연, 불길로 느껴진다.
생명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기를 원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존재가 ‘나다운 나’ 이다. 뒤집어 말하면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않고 머물러 있는 사람은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짜라두짜 역시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른 살 때 집을 떠나 산으로 간다. 서른 살이라는 나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적 삶을 시작한 의미심장한 나이이다. 짜라두짜는 산에서 십 년 동안이나 고요한 정신의 기쁨을 즐긴다. 이렇게 오래 사람 없이 지내도 미치거나 외로움에 빠져 하산하지 않았으니 무언가 굉장한 진리를 얻은 것 같다. 짜라두짜는 새벽잠에서 깨어나 떠오르는 태양 앞으로 나가 이렇게 말을 했다.
아! 위대한 태양이시여!
만약에 당신의 빛을 누리는 존재들이 없다면
당신의 기쁨도 사그라지겠지요.
지난 십 년 동안 저의 누추한 동굴에 오셨습니다.
만약 저나, 제가 돌보는 독수리나 뱀이 없었다면
당신께서는 이곳에 빛을 쪼여 주시는 것도 지겨우셨을 겁니다.
저와 독수리와 뱀은 매일 아침 당신을 기다렸지요.
당신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누렸고 당신을 찬양했지요.
제 모습을 보십시요!
저는 지금 저의 지혜가 지겹습니다.
꿀을 너무 많이 모은 벌처럼
지혜를 너무 많이 모았습니다.
저로부터 지혜를 가져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혜를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저의 지혜를 나누어 받으면
가끔 바보 같은 짓을 범하더라도 여전히 기쁠 것이며
가난한 사람이 저희 지혜를 나누어 받으면
지금의 가난 속에서도 새로운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지혜를 너무 많이 모은 짜라두짜는 그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위대한 태양이라 할지라도 빛을 쪼여 주는 존재가 없다면 권태에 빠진다.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태양(짜라두짜) 혼자 빛을 지니는 것(지혜를 가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중요한 관점이다. 빛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상대적인 개념이고 태양과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짜라두짜는 산을 내려가다 노인네 성자를 만나는데, 그는 하산을 만류한다. 하지만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광인에 가깝게 지혜로웠던 니체가 인식한 자신의 숙명이다. 스스로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몰락(하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V – 멋진 상처
멋진 상처를 가지고 나는 세상에 왔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나오는 몸치장의 전부였다.
I came into the world with a fine wound; that’s all I have to my name.
<시골의사>는 카프카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두 개의 단편 중 하나이다. 상기의 구절은 작중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소년이 집으로 왕진 온 시골의사에게 한 말이다.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의미심장한 대사이다.
카프카의 여느 작품들처럼 여기도 악몽 속을 열심히 헤매고 다니는 것 같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직업이 의사인 이 남자와 죽어가는 소년이 소설의 두 주인공이다. 이 외에도 하녀인 ‘로자’ 가 있고 그녀를 유혹해서 거의 강간하는 ‘마부’ 도 있다.
<성>이나 <소송>에도 등장하는 설정이지만, 작품 속의 남자는 젊은 여자를 금세 육체적으로 범한다. 초면에 껴안고 애무를 하더니 어느새 약혼자가 되어있는 등. 카프카의 소설은 어두운 무의식을 민감하게 포착하는데, 도덕의 제어를 받지 않고 꿈틀대는 성 에너지를 극화한 것 같다. 처음엔 이상하지만 읽다 보면 거부하기 힘든 중독성이 뭔지 알게된다.
연인 관계인 것 같은 하녀 로자를 집에 두고(마부의 성적인 제물이 될 것을 두려워함), 시골의사는 마차를 타고 앓아누운 소년의 집에 도달한다. 마차를 준비하는 과정이나 길을 달리는 모습 모두 꿈 속의 장면 같다. 시골의사는 소년을 진찰하고는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한다.
짐작했던 대로다. 소년은 건강한 것이다. 약간 혈색이 나쁘고 걱정하는 어머니가 커피를 흠뻑 먹여놓았을 뿐, 건강하고, 그저 발길로 뻥 차 침대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세계를 개선하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누워 있게 내버려 두자. 나는 구역(區域)에 고용되어 있는데, 이건 너무하다 싶은 지경까지 나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봉급은 적은데도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인색하지 않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한다. 아직 나는 로자를 돌보아야 하고 그 다음에야 소년이 권리가 있을 터이며 나 역시 죽고 싶다. 여기 이 끝없는 겨울에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
이 작품을 해석하는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시골 의사와 환자 소년을 다른 두 사람으로 보지 않고, 카프카 자아 안에 있는 인격을 둘로 분리한 것으로 파악한다. 시골의사는 자신이 세계를 개선하는 사람이 아니고 고용되어 있는 처지라고 하는데, 스스로의 마음을 치유하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를 토로한 것이다. 시골의사는 소년이 멀쩡한 줄 알았지만 나중에야 그의 옆구리에 끔찍한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발견한다, 정말로 소년이 아프다는 것을. 그의 오른쪽 옆구리, 허리께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상처는 여러 가지 농담(濃淡)의 장밋빛, 깊은 곳은 진하고 가장자리께로 올수록 옅어지며 고르지 않게 모인 피로 연하게 오돌도돌한 것이 파헤친 광산처럼 열려 있었다. 그것은 멀리서 본 모양이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더 심한 상태가 나타났다. 누가 그것을 나직이 으흑 소리를 토하지 않고 들여다보겠는가? 굵기와 길이가 내 작은 손가락만한 벌레들이 본디 색깔에다가 피까지 뿌려져 분홍색으로, 상처의 안쪽에 들러붙은 채 조그만 흰머리와 수많은 작은 발들로 빛 있는 쪽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불쌍한 아이야, 너를 도울 길이 없구나. 나는 너의 큰 상처를 찾아내었다. 네 옆구리의 이 꽃으로 말미암아 너는 죽을 것이다.
이 무서운 상처는 소년 – 카프카 자신 – 의 가장 어두운 일면을 나타낸다. 세상에 나오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멋진 상처’ 이다. 하지만 상처가 꽃처럼 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카프카는 스스로를 외롭고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인간라고 인식했다. 그 때문에 연인을 만나 사랑하면서도 맘껏 다가서지 못하고 약혼과 파혼을 반복한다. 하지만 상처는 역설적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그가 평생을 두고 몰두한 글쓰기는 고난과 상처로부터 만 제대로 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프카에게 궁극적인 구원은 죽음이 되고 말았는데, 그의 육체적 상처였던 폐-후두 결핵이 악화되어 연인 도라 디아만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그의 문학이 줄곧 예기해왔던 처절하지만 예술적인 죽음이었다.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I – 재앙 같은 죽음 같은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다. 책이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카프카가 1904년 문학 친구였던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자살과 같은 느낌, 자신보다 더 사랑한 사람의 죽음 같은 충격. 정신의 얼음을 깨는 도끼. 카프카가 문학에서 이끌어 내려 했던 건 이런 어마어마한 심상들이었다. 편지를 쓸 당시 그는 무명작가였는데, 비록 죽고 나서는 진가를 인정받게 되지만, 자신이 써내려가고 있는 글의 가능성을 잘 깨닫고 있었다. 처음 읽으면 횡설수설 같기만한 그의 작품이 어떻게 그토록 특별한 촉매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자.
단편 <변신>은 그냥 읽어도 재미있다. 의류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그레고르 잠자가 주인공이다. 이 평범하고 선량한 남자는 어느날 갑자기, 그리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큰 갑충(甲蟲)으로 변한다. 장면 두 개가 계속 기억에 남았다. 집에서 여동생이 아름답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걸 듣고는, 이런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자신(그레고르)이 벌레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장면이 하나.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힌 그레고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니 가족들이 함께 기쁜 마음으로 나들이 가는 장면이 두 번째였다. 이상한 유머가 넘쳐서 이토 준지 공포 만화를 읽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독의 삼 부작으로 꼽히는 최고의 작품 <소송>, <성>, <실종자> 는 상당한 마음가짐과 인내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일단 기승전결이 없고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른채, 이상하고 장황한 설명이 끝없이 이어진다. 아래 옮긴 <소송>의 한 부분을 보면 전형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변호사는 그에게 뭔가를 자세히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을 하려면 물어봐야 할 것이 많은 법이다. 질문이야말로 가장 주가 되는 일이 아닌가. 자기라면 이 일에 필요한 온갖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변호사는 질문은 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거나, 아니면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그의 맞은 편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귀가 잘 안 들리는지 책상 위로 몸을 약간 구부린 채 수염 한 가닥을 잡아당기며 양탄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아마 K가 레니와 함께 누워 있던 바로 그 자리인 것 같았다. 이따금 변호사는 K에게 아이들에게나 할 법한 별 내용 없는 훈계 몇 마디를 던지기도 했다. 그것은 정말 따분하고도 쓸데없는 이야기들이라서 K는 최종 수임료를 정산할 때 한 푼도 주고 싶지 않았다. 변호사는 그를 충분히 주눅 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다시 약간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들었다.
그는 당연히 즉시 작업에 착수했고, 첫 청원서가 이미 거의 완성 되었다고 했다. 변호사 측의 첫 인상이 소송의 전체 진행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첫 청원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K가 유념해야 할 점도 있는데, 법원에서 첫 청원서를 전혀 읽어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즉 법원에서는 당분간은 피고인을 심문하고 관찰하는 것이 글로 써놓은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첫 청원서를 다른 서류들 속에 그냥 던져놓는다는 것이다.
주인공 K의 목숨이 걸린 것이건만 무슨 죄 때문에 걸린 재판인지는 작품 끝까지 안 나온다. 변호사는 일에 대한 의욕이 없는 것 같고 도움 안 되는 훈계만 던진다. 첫 청원서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다가, 정작 법원에서는 청원서를 전혀 읽지 않는다는 설명도 한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설명은 작품 전체에 걸쳐 열심히 반복된다. 처음 읽으면 뜬금없다가 나중으로 가면 점점 웃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일관적으로 비이성적인 설명이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자폐증이 있는 아이가 물건을 가지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걸 보는 느낌이다. 카프카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독자를 이끌지만, 그가 혼란을 주기 위해 혼란스러운 글을 쓴 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왜 이런 뒤죽박죽 글이 얼어붙은 마음을 깨는 도끼가 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카프카는 이성이 앞서는 명료한 정신을 그리려 했던게 아니었다. 그는 무의식이 만들어 내는 야릇한 꿈과 같은 환상에 주목했다. 환상을 그려냈기 때문에 비논리적 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관해 논한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글을 읽어보자. 카프카를 가장 탁월하게 분석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을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만한 작품으로서 평가하게 될 것이다.
꿈 속에서 욕망과 공포 같은 원초적 정신 에너지는 꿈틀대지만 논리나 기억의 연결은 흩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똑똑한 사람이라도 꿈 속에서는 바보짓을 하고 헤맨다. <성>에 나오는 측량사 K의 행동을 생각해보자. 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욕망)는 확고하지만, 노력하는 K의 행동은 이성적인 것과 동떨어져 있다. 마치 불안한 악몽 속에서 연인을 만나기 위해 투쟁하는 남자 같다.
카프카 작품 속 ‘꿈의 바보짓’ 은 다른 중요한 의미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꿈이 아닌 진짜 생에서의 투쟁도 반드시 명료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토마스 만은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 라고 표현했다.
생의 그림자 놀이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플라톤이 얘기한 ‘동굴의 우상’ 개념과 이어진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동굴 속에 묶여서 평생 산다고 할 때, 동굴 밖 존재로부터 전해지는 이미지는 모두 그림자이다. 하지만 동굴 속 사람은 그 그림자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알고 산다.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동굴 속 존재라고 여기지 않으며, 세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한정된 경험과 숙명적 편견에 둘러싸여 있다.
이유 없이 재판에 걸리고, 결국 처형당하는 <소송>의 주인공 K 나 아버지에게 익사형을 언도받고 스스로 강물로 달려가 형을 집행하는 <판결>의 주인공 게오르그를 보면 ‘존재 자체가 유죄’ 라는 관념이 나타난다.
이유 없이 처벌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이유도 모른채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필연적인 한계(동굴의 우상)를 가지고 이상한 그림자 놀이(삶의 투쟁)에 몰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프카가 처음으로 표현한 실존주의적 원죄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의식과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몽환성이 그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특이한 분위기가 합쳐져서 독자를 그의 글에 빠지게 만드는데, 마음에 고통을 주는 재앙처럼 강렬한 문학의 힘을 느끼게 한다.
카프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 – 데미안과 카프카
무슨 설문조사 결과에서 읽은 사실이다. 우리나라 대학 입시 면접에서 교수가 “이제까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은 무언가?” 라고 물으면 면접 학생들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가장 많이 얘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주위에 물어보면 이걸 읽고 좋았다는 사람보다는 무슨 말인지 몰라 지겨웠다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현 입시제도 내에서 불쌍한 고교생들은 시키는 공부를 군말없이 할 것을 압박받는다. 지금 힘든 것도, 삶의 의미도 일단 잊고, 입시 공부에 무당 접신하듯 몰두하는 것이다. 반면 <데미안>의 주제는 인간 각자가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래 옮긴 데미안 책 구절을 읽으면 잘 알 수 있다.
내 가슴 속에서 치솟는 어떤 것, 나는 오로지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토록 어려웠던 것일까?
내 가슴 속에서 솟는 어떤 것은 존재의 본류로부터 흘러나오는 정신이다. 형언할 수 없고, 개척되지 않았지만, 나의 것이라고 느껴지는 운명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려운 이유는 존재 본류를 가로막는 인공적인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물이란 세상에 길들여지며 정신에 들어와버린 티끌 같은 것들이다.
티끌 즉 가짜 자아는 집단 가치의 형태로 들어오며, 사회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긴 하지만 본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자아와 계속 마찰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학벌의식, 외모 컴플렉스, 명예욕 같은 것들이다. 좋은 대학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데미안에 따르면 주체적 운명의 길이 아닌, 사회가 준 숙제를 푸는 것 정도이다.
그래서 만일 고교생이 진정 <데미안>에 감동받았다면, 명문대 입시 사람 공장이 되어있는 현 교육체제 부터 비판하고, 유명 래퍼 도끼처럼 자수성가하는 예술의 길을 갈 것 같다. 하지만 늘 사회는 돌출 행동을 하는 모난 돌에 정을 맞추려 하고, 보수적인 대학입시 면접관들도 도끼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주제를 돌려 프란츠 카프카로 돌아가 보자. 카프카도 데미안이 말하는 ‘가슴 속에서 치솟는 것’ 을 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은 ‘글쓰기’ 라고 하는 창작 행위에 중심을 두고 있다.
카프카의 문학에 대한 몰입은 아주 순수했던 것 같다. <카프카 평전>에 실린 편지나 생전 기록들에 따르면, 그는 작품 <화부>로 폰타네 문학상을 받았지만 기뻐하지 않았고, 자기 작품이 왜 빨리 유명해지지 않나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는 폐결핵에 걸려 죽기 전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이 남긴 원고를 모두 불태워 줄 것을 부탁까지 했다.
그는 글 쓰는 것에 자기 존재를 걸었고, 마치 화가 반 고흐가 그림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을 보는 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여기서 내게 들었던 궁금증은 ‘글쓰기’ 가 어떤 느낌을 주었길래 그렇게 일생을 걸었느냐는 것이었다. 아마 한국 고교생이 하는 입시 공부 같은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래는 이주동作 <카프카 평전>에서 옮긴 내용인데 한 번 읽어보자.
그는 “예전부터 자신의 행복, 능력 그리고 가능성” 을 “문학적인 것” 으로 이용해왔는데, 그가 글을 쓸 때면 슈타이너가 말하는 “천리안적인 상태”, 즉 “망아 상태” 에 종종 빠지게 되며 “그 상태에서 모든 착상이 이루어지고, 그 상태에서 모든 착상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그 상태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모든 한계를 느낀다” 고 밝혔다.
망아(忘我) 상태는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고 세계와 합쳐져 떠다니는 듯한 기분을 말한다. 아름다운 음악에 흠뻑 젖는다든지, 사랑하는 연인을 안고 있을 때의 기분이다. 자아의 감각이 없기 때문에 아집도 없고, 천리안적인 직감을 느낀다. 이런 예술가의 육감(六感)이라 부를 수 있는 감각이 카프카에게는 ‘가슴에 치솟는 어떤 것’이었으며, 거기에 일생을 바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매이지 않고 예술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