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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 오사카의 영화도 꿈 속의 꿈

아시가루(병농일치의 최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닌의 난 이래 100년 이상 지속된 일본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천하인(天下人)이 된 인물. 세계사를 두고 보아도 평민 출신으로 이 정도 출세를 한 사람은 중국 한고조 유방(劉邦)이나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혹은 로마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Vespasiānus) 정도가 떠오른다. 일본에서는 “戦国一の出世頭(전국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로 일컬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센고쿠 시대(1467~1573) 오와리의 영주였던 오다 노부나가 아래서 군사, 행정적 실무 능력에서 두각을 나타내 일개 병사에서 주요 방면군 사령관이자 석고 50만석의 대 다이묘의 위치까지 이르렀다. 어려서 보따리 행상을 하는 등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병사와 평민들의 심리를 잘 이해했고 이를 통해 전투 지휘 뿐 아니라 대규모 공병, 병참 작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히데요시의 주군인 노부나가는 자유무역을 보장하여 영지의 부를 축적하고, 신무기 뎃포(조총) 부대를 밀집대형으로 운용하는 등 혁신적인 전략전술을 사용해 통일 전쟁을 벌였다. 하찮은 보병 출신인 히데요시나 군소 호족의 아들인 타키가와 카즈마사의 능력을 알아보고 군단장까지 진급시키는 등 용인술도 뛰어났다. 노부나가는 일본 전국의 반 정도를 정복할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포악하고 거침없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몇몇 부하들에게 원망을 산다. 열 받은 부하 중 한 명인 아케치 미쓰히데는 1582년 일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모반사건을 일으킨다. 미쓰히데는 주고쿠(일본 혼슈의 최남단)로 원정을 떠나기 위해 자기 영지에 동원되어 있던 대군의 방향을 돌려서 노부나가를 습격했다. 소수의 호위 인원만 거느린 채 교토 혼노지에서 머무르던 노부나가는 미쓰히데 군에 포위되어 할복 자살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다.

천하인이던 노부나가와 그의 후계자였던 큰 아들 노부타다가 혼노지의 변으로 나란히 죽음을 당하자 오다가는 권력의 진공 상태에 빠진다. 노부나가에게는 죽은 노부타다 말고도 장성한 아들이 여럿 있었지만 결국 권좌을 다투게 된 것은 대군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선의 군단장들이었다. 히데요시는 우선 미쓰히데의 군대를 무찔러야 했다. 미쓰히데에게는 주군을 살해한 역신이라는 오명이 덧씌워져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 입장에서 동맹군을 모으기 좋았다. 그는 미쓰히데 군의 2~3배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시켜 속도전(速度戰)을 걸었다. 결국 야마자키 전투 한 번으로 자신과 대등한 오다 가문 군단장이던 미쓰히데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주군의 원수를 갚음으로서 히데요시의 명성은 드높아졌고, 그는 오다가 전체의 군권을 잡기 위해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과 연합한 동료 장군 시바타 가쓰이에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시즈가타케에서 벌어진 전투 한 번으로 가쓰이에를 멸망으로 몰아넣는다. 이 전투에서도 히데요시는 사전 외교의 능수능란함과 야전 지휘의 민첩성을 보여주었다.

야마자키와 시즈가타케 두 번의 싸움으로 히데요시는 오다가의 최고 실력자이자 일본 국토 반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로도 기세를 몰아 유력 다이묘(大名;봉건영주)들인 도쿠가와, 모리, 우에스기, 시마즈, 호조가를 차례차례 굴복시켰다. 오사카에 거성을 축조하고 천하인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때 히데요시의 관직은 주군이었던 노부나가를 넘어 천황 조정 최고직 간파쿠(関白)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에 이르렀다.

여기까지에 만족해 멈추었다면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도 출세의 교본이 되는 영웅이 되었겠지만… 나이 55세가 되던 해 임진왜란을 일으킴으로서 국제적 악명을 널리 알리게 된다. 히데요시는 현해탄을 건너 조선을 점령하고 이어 명나라 전체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당시 세계관에서 중화를 지배하는 명나라는 세계의 중심이자 천조국(天祖國)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히데요시가 연전연승했던 데에는 병력, 병참상의 우위를 확보하고 이길 수 밖에 없는 전쟁을 상대에게 강요한 데 있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 명나라에게 싸움을 거는 것은 병력 수나 보급 상황면에서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무모하게 시작된 전쟁은 영토 한 뼘 얻지 못하고 조선 파견 군대 전원을 일본으로 철수시키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57세의 나이로 후계자인 아들 히데요리를 얻었다. 히데요시 자신이 주군 노부나가의 죽음 후 그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자기가 죽고난 후 부하 누군가가 어린 히데요리를 물리치고 정권을 빼앗을거라는 걱정을 안할 수 없었다. 나름의 안전대책을 마련했으나 그의 사후 걱정은 그대로 현실이 된다. 죽음에 앞서 출세와 인생의 허무함이 잘 담겨있는 사세구(辭世句)를 남겼다. 향년 62세.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나니와 1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Notes:

  1. 오사카 인근의 옛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