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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다는 기억, 존재를 잊게 만드는 기억상실

기억은 감정과 연결되고, 감정은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추운 겨울날 새벽 거리를 걸으면 무표정한 사람들을 수없이 지나치지만 모두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같이 손을 잡고 걸었던 한 사람은 마주 잡은 손의 감각과 비스듬하게 보이던 얼굴, 외투, 나누던 말까지 모두 기억난다. 마음이 기억이 되고, 관계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그걸 끊어버리는 병도 있다.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린 사람은 기억을 잃어버린다. 사람의 뇌는 컴퓨터 메모리처럼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가 따로 존재한다. 이 부위가 알츠하이머로 인한 위축(atrophy)으로, 아니면 혈관 장애나 감염, 염증 등으로 파괴되면 사람은 기억을 잃는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던 간절한 기억도 깨끗이 날아가 버린다. 기억이 없기 때문에 매일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게 반복된다. 아래는 신경 질환에 관한 대중 저서로 유명했던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전 컬럼비아 대학 교수가 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라는 책의 내용이다.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기억상실 뿐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 루이스 부뉴엘 1

그는 순간 속의 존재이다. 말하자면 망각이나 공백이라는 우물에 갇혀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게 과거가 없다면 미래 또한 없다. 끊임없이 변동할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순간순간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신경과 의사였던 저자는 뇌신경의 일부가 손상되어 기억을 자꾸 잃어버리는 환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억이 없다면 과거가 없어질 뿐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도 없어진다. 결국 끝없이 변하는 순간순간만 남는다. 기억상실은 나이든 사람에게 나타나지만, 아예 기억이 시작도 안된 사람은 어떨까? 나는 집 마루에서 열심히 기어 다니는 아기 조카를 보며 기억 없이 사는 게 어떤 건지 느끼곤 한다. 작고 따뜻한 이 생명체는 자극에 반응하며 목적도 없이 순진무구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일정 이상 기억이 쌓여버린 어른은 그 집적에 반응해야만 한다.

감히 말하자면 우리는 무수히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차례차례 계승되고, 움직이고, 변하며, 흘러간다.

아기는 아니지만, 어른의 기억상실은 병원 치료의 대상이다. 올리버 색스 교수는 자꾸 기억을 잃는 환자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매일 일기를 쓰라고 권유했다. … 그러나 나의 권유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무엇보다도 그가 항상 일기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그가 일기장을 몸에 지니고 다니게 해야 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별 효과를 얻지 못했다. 그는 날마다 짧은 메모를 일기장에 착실하게 적어놓기는 했지만 바로 그 전날 자신이 쓴 것을 보고도 그것을 이해하질 못했다. 자신의 필적이나 문체는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 전날 자신이 무엇인가를 썼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곤 했다.

기억상실의 종착역은 존재의 망각이다. 기억이 없어지면 자신에 대한 자각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는 대다수에게 옳지만 이 환자의 경우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한다는 걸 자주 망각한다. 그래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가 되었다. 살고 있다는 것, 생각하고 있다는 것, 모두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어떤 병은 이 모든 걸 리셋시킨다. 고상한 의미로 포장되어 있는 사람의 존재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밀어 넣는 것이다.

Notes:

  1. Luis Buñuel (1900년 2월 22일 ~ 1983년 7월 29일) 스페인, 멕시코의 영화 감독, 각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