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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II – 꿈 속의 꿈에서의 사랑

 
 
사람 그림자가 반이고, 시간과 공간의 연결이 끊어지고, 주인공의 아빠라는 사람이 조니워커 위스키 병 모델 같이 차려 입고 나오는 소설의 상황은 왜 그런 것인가 생각해 보자.
 

(좌) 실제 조니워커 병 모델 (우) 소설 속 조니워커 상상도


 
장난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이건 작가의 영혼 탐구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치유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사람 정신의 작동방식은 이성적인 것만이 아니고, 깊은 곳의 혼돈스런 무의식과 연결 되어 있다. 프로이트나 융이 말했던 그런 의식이다. 그래서 어지럽고 뜬근없는 마음의 파편을 이해하면 상처를 낫게 하는 길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파편은 꿈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예시로서 프란츠 카프카의 <성>이라는 작품을 들 수 있다. 측량사 K라는 주인공이 추운 겨울에 한 낮선 마을에 도착해서 마을 언덕 꼭대기로 보이는 성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마치 악몽 속을 헤메는 것처럼, 가려할 수록 더 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성에 가는데 별 도움을 주지 않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줄거리라고 할 수도 없는 이야기가 죽 늘어난다. 읽고 나면, “내가 뭘 읽은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작품 <성>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왜냐면 꿈 속에서 헤매는 아이러니가 실제 삶에서 헤매는 아이러니와 중첩되기 때문이다.
 

노벨 연구소 선정 최고의 책 The Castle by Franz Kafka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을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만한 작품으로서 평가하게 될 것이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프란츠 카프카 평론>

 

토마스 만 평론 내용은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중국 고전 <장자>에 나온 이야기인데, 사람이 호랑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나비인게 너무 즐거웠다, 근데 깨보니 사람이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지금 사람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다.
 
장폴 사르트트, 알베르 카뮈 같은 실존주의 문학가들이 이 컨셉을 좋아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려는 사람은 아주 열심히 사는 것 같다. 온 시간과 피와 땀을 들여 노력을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예를 들어 셀럽이 되어서 부와 명예와 세상의 부러움을 다 얻어도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는 것도 인간이 나비의 꿈을 꾸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주체와 관점에 따라 허무한 것이 된다.
 
그래서 카프카 작가도 하루키 작가도 공통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생에서 가장 절박하고 영속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는 테마이다. 그게 바로 기억과 사랑이다.
 
 

★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영화 메멘토(Memento)의 장면이다. 주인공은 선행성 기억상실증(앞으로 진행되는 사건을 기억 못함. 기억상실증 이전 사건들은 잘 기억함)을 앓고 있는데, 그런 가운데 자기 아내를 죽인 범인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그런데 스포일러이지만 실제 아내 살해범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이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오시마 청년이 몇 번 했던 중요한 대사가 ‘만물은 메타포’ 이다. 독일의 괴테가 책 <파우스트>에서 한 말을 인용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건 상징으로 나타나는 데, 뇌에서 한 번 해석된 후 저장되는 것이어서 그렇다. 메멘토 주인공은 그 상징을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의 순서를 끝에서 처음으로 거꾸로 돌려 보여주면서 기억와 거기에 메타포로 붙은 감정인 애정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사에키 씨의 경우를 살펴보자.
 

저는 이 도시로 돌아온 이래 줄곧 책상 앞에 앉아서 이 원고를 써왔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글을 쓴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근처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살던 한 소년을 깊이 사랑했어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사랑했지요. … 우리는 완전한 원 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 원 안에서 완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시대는 변하고 있었어요. 원은 여기저기 터져서 밖의 것이 낙원 안쪽으로 들어오고, 안쪽의 것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 그래서 저는 그런 침입이나 유출을 막으려고 입구의 돌을 열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은 잘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의 저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겠지만 저는 그 벌을 받았습니다.
 
<사에키 씨가 나카타 노인에게 한 말>

 
그녀는 오래 전 소녀였을 때의 연인을 잊지 못하는데, 그때 이룬 완전한 세계를 지키려고 다른 세계의 입구를 열어 버렸다.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건데, 실제 세상에서도 실연으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니 그걸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 보면 된다.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의 미스 하비샴. 결혼식 직전 약혼자에게 버림 받은 후 집안의 시계를 멈춰놓고 웨딩드레스를 그대로 입은채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런 분열된 정신이 회복하는데는 사랑과 합일이 필요한데, 다무라 카프카 소년과 나카타 노인이 그 역할을 해주고, 사에키 씨도 두 주인공에게 비슷한 도움을 준다. 고무라 기념 도서관으로 찾아온 나카타 노인에게 사에키 씨는 말한다.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애정의 감정이 클수록 모순도 늘어나는데, 사랑이 기억과 매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상징이고 가변적이기도 해서 부조리가 될 수 있다. 사에키 씨는 자신이 쓰던 원고를 나카타 노인에게 넘겨 주고 태워달라고 한다. 이 원고는 추억의 집약체인데, 사에키 씨의 소녀 시절 연인이 죽으면서 완성되지 못했던 것이 다무라 카프카 소년이 도착함으로서 완성이 되었고, 기억은 사랑이라는 매개를 통해 한 사람 안에서 완결성을 띄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소멸시킨 것이다. 자기 작품을 모두 태워 달라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부탁하고 죽은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최후와도 같다.
 
 

(좌) 막스 브로트 (우) 프란츠 카프카


 

사에키 씨는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찻잔을 내려다본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미 거기에는 없지.”
“그럼, 사에키 씨는 내가 거기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거죠?”
“내가 다무라 군에게 원하는 건 단 한가지뿐이야” 하고 사에키씨가 말한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를 기억해 주는 것.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
 
<사에키 씨가 마지막 만남에서 다무라 카프카에게 한 말>

 
사에키 씨는 이 말처럼, 자신의 메타포를 소년에게 남기고 편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제 더 이룰 게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