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영화배우 이은주씨가 자살했을 때 인터넷 뉴스 댓글에는 왜 저렇게 젊고 예쁘고 명성도 있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하는 글이 많았다. 하지만 유서 내용에도 있듯이 자신이 겪는 힘듦은 자신에게만 실제적이고, 가늠이 가능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자신이 겪는 행복도 스스로에게만 지극하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 않고, 행복을 자가 생산할 수 있으면 불행도 통제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기쁨을 누렸던 역사 인물을 생각해보면, 니체가 대표적으로 떠오른다.
살아 생전 그의 작품은 빛을 보지 못했지만, 스스로가 자기를 인정했다. 니체의 책 <이 사람을 보라>의 목차엔 ‘나는 왜 이렇게 지혜로운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가?’ 등의 제목이 있다… 니체의 똑똑한 친구들도 니체의 글을 반 쯤 밖에 이해 못했던 것 같다. 대표적 친구인 에르빈 로데(Erwin Rohde) – 당대의 유명한 그리스 고전문헌 학자였음 – 에게 니체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짜라투스트라>로서 독일어를 완성에 이르게 했다고 자부하네. 그것은 루터와 괴테를 이은 제3의 발전이었네.
하지만 로데는 짜라투스트라 책을 힘겹게 읽었고, 그 다음으로 출간된 책 <선악의 저편>을 읽은 후에는 폭발하고 말았다. “니체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직업을 갖는거야!” 라고. (니체, 그의 삶과 철학 by 레지날드 J. 홀링데일 p65)
당시 니체는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결혼할 배우자 찾는 것도 안하고, 혼자 휴양하면서 친구에게도 대중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책만 쓰고 있었다. 안정된 직업과 가정, 사회적 지위까지 있던 로데는 니체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삶이 반영된 글에도 당연히 공감하지 못했다. 자기 능력의 백 분의 일도 인정받지 못했던 니체가 어떻게 자기확신과 행복을 가졌을까는 연구해 볼만한 주제이다. 나는 <비극의 탄생> 책에 나온 아래의 구절이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현존과 세계는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미적인 현상은 사람에게 행복감을 준다. 예쁜 연예인을 보며 정줄 놓은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예쁜 여자 말고 다른 수많은 사물에서 그 같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지금 사는 것(현존)과 주위 세상(세계)는 더 없이 만족스러워(정당화)진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명하다. 최고가치의 상실에 대한 선언으로 해석되며, 꼭 기독교적 신에 대한 반대는 아니다. 이 말의 중요성은 신은 죽었는데 이제 뭘 할거냐는 것이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하나님처럼 섬기는 무언가가 있다. 출세나 재산, 외모, 사람들로부터 인정 같은 것이다. 이은주씨는 이걸 모두 가졌지만 행복을 얻지 못했었다. 누구나 나름의 가치 추구를 하고 있고, 충족받지 못하면 허무해지고 고독해진다. 니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서 영속적인 행복의 길을 찾았다.
자신의 상태를 예술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자신에게 닥친 슬픔과 고통,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모든 것을 순식간에 돌로 만들어버리는 고르고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능력이다. 그것은 고통이 전혀 없는 세계에서 유래한 시선이다. (J3, 334)
니체는 자신 생의 요소와 그 누림을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게 느꼈던 것 같다. 슬프고 우울해도, 어떤 대단한 역사나 문학 안의 주인공처럼 자신을 느끼면, 고난도 미학적 현상으로 치환된다. 주위 사람들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일자리에서 별 볼일 없는 성과를 낼 때도 즐겁게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니체는 자신의 시대에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인기가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면 가치를 창조하는데 매우 뛰어 났고, 거기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어려서 읽은 동화가 실은 병적인 어른 심리를 바닥에 깔고 있다는 걸 알고 놀라울 때가 있다. 그림 형제 동화 중 하나인 ‘백설공주’ 에서 왕비는 매일마다 마법 거울 앞에서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라고 말하곤 했다(억양까지 잊혀지지 않는 대사).
왕비가 제일 예쁘다는 말을 듣는 동안은 평온했지만 어느 날 솔직한 거울이 백설공주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말하자 온갖 사단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왕비는 허영이 지나쳐 자기보다 예쁜 여자는 살려둘 수 없다는 정신병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뛰어난 심리 해설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 책 초반부 부터 허영의 심리에 대해서 예리하게 파헤친다. 허영은 행복을 망치는 심리이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인 ‘사랑하는 능력’ 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허영심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모든 활동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말살해 버리기 때문에, 허영심이 지나친 사람은 결국 무기력과 권태에 빠지게 된다. 허영심은 자신감이 부족한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존감을 키워야 허영심을 치료할 수 있다. 자존감을 기르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적인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활동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 뿐이다.
지나친 허영은 자신감의 부족으로부터 온다고 말하고 있다. 놀라운 해석이다. 자존심이 너무 세서 허영심이 강한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불안해지고 공허해지고, 결국 그걸 메우기 위해 허영에 빠지는 게 맞다. 결국 허영심은 과거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던 기억으로부터 오는 반동 심리, 병적 심리가 된다.
그래서 허영심 에서 탈출하려면 먼저 상처의 기억으로 크게 어그러져 버린 자아의 감옥을 허물고, 즐겁고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인간의 본능은 완전한 자기중심성과는 거리가 멀고, 자기도취적인 경향이 있는 사람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인간과 마찬가지로 늘 자신을 인위적으로 제약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난 사람이 가진 특징 중에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된다. 사랑은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받는 사랑은 마땅히 베풀어야 할 사랑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두 종류의 사랑이 비슷한 수준으로 존재할 때 사랑은 그 최대의 가능성을 달성할 수 있다.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은 남을 잘 사랑해주는 능력도 갖춘다. 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외모가 아니더라도 매력있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오프라 윈프리 같은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감이 넘치지만 오만하지 않다. 이해심이 있으며 말을 재치있게 한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들이다. 허영심을 버리고 대신 가져 볼 만한 미덕이다.
니체가 바그너를 좋아했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니체는 피아노 연주를 할 줄 알았고 작곡을 하기도 했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도 음악을 좋아했는데, 니체도 그랬다. 집단의 가치관인 사상을 창조하는데 있어 예술적 감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니체에게 예술은 사상과 따로 분리된 게 아니었고, 예술이 사상이고 사상이 예술인 경지를 추구했다. 사상이 머리 속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표현되면 무용이 되고, 리듬과 멜로디로 조화되면 음악이 된다.
현대 무용의 선구자인 이사도라 던컨은 니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는데, 무용에서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작으로서의 최초의 움직임을 발견하는 것’ 을 추구했다. 또한 ‘귀에 들리지는 않으나 어떤 분명한 리듬에 의해 생겨나는 듯한 움직임을 발견하는 것’ 을 말하기도 했다. 던컨의 말은 니체가 얘기한 근원 정신과 연결되는 무아無我의 예술 을 잘 표현한다.
근사한 음악을 들으면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달콤한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이런 무아의 상태에서 니체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책을 읽는 사람도 만약 교감이 잘된다면 이런 황홀경에 빠질 수 있다. 아래는 뤼디거 자프란스키作 <니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에서 옮긴 구절인데 한 번 읽어보자.
니체는, 하나의 사상이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해서 아름답고 인상적인 외관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언어의 외적인 스타일에 대한 감각을 니체는 우리가 육체를 통해서 얻게 되는 느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가 언어에 반응하는 것과 우리 몸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에 대해서도 경쾌하고, 활동하고자 하는 활기찬 욕망이 생기는 경우에서부터 늘어지고 심지어는 욕지기가 나오는 경우까지 겪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타인을 감동시키는 문장을 추구했으며, 이러한 문장을 걸으면서 구상했는데 그것은 리듬을 나타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종종 그는 자신의 사고를 만들어내고 언어를 만들어낼 장소를 탐색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읽어보면 작품 전체가 산문(散文)이 아닌 운문(韻文)으로 된 시처럼 느껴진다. 니체가 좋아한 그리스의 술 주정뱅이 신 디오니소스의 정신이 미친 시인을 통해 암송되는 것 같다.
이터널 선샤인 이라는 영화의 이름은 알렉산더 포프의 시 ‘Eloisa to Abelard’ 에서 따왔다.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는 뜻이다. 이 영화에서는 실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슨 기계의 도움을 받아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지우려는 남녀가 등장한다. 여자가 먼저 남자의 기억을 지웠는데, 그걸 모르던 남자는 간만에 만난 여인이 자신을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잊혀지지 않는 장면). 아무튼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여자와 똑같은 방법을 써서 자기 기억도 지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오감이 자석처럼 서로를 당기는 탓인지 모르지만, 다시 만난다. 처음 우연히 마주쳤던 기차가 닿는 바닷가 마을에서 조우해서 다시 똑같이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의 상징과 결말은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와 잘 통하는 면이 있다. 문학 작품에서 태양은 신神, 절대자, 하나님을 상징하고, 영원한 햇살은 영원한 사랑, 즉 아가페가 된다.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이라는 구절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영원한 사랑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랑’ 은 영원회귀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삶에 대한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긴 삶에 대한 사랑의 반대이다. 모든 사랑은 순간과 영원을 생각한다. – 그러나 결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고병권 작가의 <니체의 위험한 책>에서 옮겨온 구절이다. 말 그대로 사랑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본다. 사랑에 제대로 빠져있는 사람은 몸이 가벼워 둥둥 떠다니는 것 같고 달콤한 기분에 젖어 있다. 그런 순간에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랑이 끝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미 티끌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본질 안에 영원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고, 자신의 공부와 일과 이상(理想)을 포함하는 운명을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랑이 영원히 돌아온다면 영원회귀가 된다. 니체는 Amor Fati 즉 운명애(運命愛) 라는 말을 했는데, 모든 다가오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마음에 아무런 주저(티끌) 없이 자기 삶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운명애를 이룬 사람이다. 이 운명애가 극진해지면 영원회귀로 들어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구절들을 읽어보자.
그러나 내가 엮어져 있는 인과의 매듭은 영원히 회귀한다. – 그것이 나를 다시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 회귀의 그런 원인들의 일부인 것이다. 이 태양과 더불어, 이 대지와 더불어, 이 독수리와 더불어, 이 뱀과 더불어, 나는 다시 돌아오리라. 새로운 삶, 혹은 보다 나은 삶이나 유사한 삶으로가 아니라, 최대의 것에 있어서나 최소의 것에 있어서나 지금과 동일한 이 삶으로 나는 영원히 돌아오리라. – 다시 한 번 만물의 영원 회귀를 가르치기 위해, 또다시 대지와 인간의 위대한 정오를 가르치기 위해, 다시금 인간에게 초인을 알리기 위해.
나와 내 운명은 오늘을 향해 말하지 않으며, 결코 오지 않을 날을 향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미 말을 하기 위한 인내와 시간,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언젠가 와야 하며 결코 지나쳐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와야 하며 그냥 지나쳐 가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의 위대한 하자르, 우리들의 거대하고 먼 인간제국, 차라투스트라의 천년왕국이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 자신의 운명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다시 살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고스란히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이 성립하고 이것이 영원회귀의 근거가 된다. 극진한 시간에서 시간은 길이가 아니라 영원이 된다. 설령 기억이 지워진다해도 의지는 같은 운명을 다시 만들어 낸다. 마치 이터널 선샤인의 두 주인공들 처럼. 그래서 영원한 회귀 안에서는 생성이 그 자체로 시간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고난과 시련이란 이름의 마차를 타고
폭풍 이는 벌판 위에 영원히 피어나라
Wake up, my queen 첫 눈물의 여왕이여
Now arise, my queen 운명의 주인이여
너 홀로 의지의 배를 타고 내게로 오라
이 영겁의 고독에서 몸부림치는
날 구해다오
넥스트(N.EX.T)의 ‘사탄의 신부(新婦)’ 라는 곡의 가사이다. 이제 고인이 된 신해철님은 철학과 출신 답게 실존주의 분위기의 가사를 자주 썼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운명의 주인이여’ 라는 부분에서 항상 감동을 받았다. 운명의 주인 이라는 말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된다는 것과 비슷한 뜻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니체 해설서를 많이 쓴 고병권 작가님의 책 구절을 읽어보자.
우리가 니체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동정을 받아야 할 쪽은 우리들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생애의 대부분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왜 만들어 놓은지도 모르는 가치와 규범에 복종하고, 미리 정해져 있던 길을 따라 의미없는 생을 이어간다면 그 생은 죽음보다도 비참한 게 아닐까. 그러나 니체는 적어도 자기 삶의 많은 순간들에서 주인이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했다. 스스로를 돌이켜 봤을 때, 인생의 처음 20년 정도는 외부에서 정해놓은 가치와 규범에 복종했던 삶이었다. 너무 당연한거라 느끼고 의식도 못하고 있었지만 삶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중산층으로 태어나 학벌을 만들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하지만 그렇게 정해진 생을 사는 건 결국 허무의 문제를 불러온다.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필요가 있다. 운명의 주인 이라는 말에는 우선 자기 운명은 멋진 것이라는 함의가 있고, 또 그것의 주인은 오직 자신 뿐이라는 자신감도 담겨있다. 내 운명은 거지같이 살다가 거지같이 죽는거야 라고 믿는 운명의 주인은 없다. 그렇다면 니체 자신이 생각한 운명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저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읽으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나의 운명을 안다. 언젠가는 나의 이름에는 엄청난 사실이 추억으로 연상이 될 것이다. 즉 세상에서 전대미문의 대 위기와 가장 심원한 양심의 갈등, 그리고 이제까지 신뢰되고 요구되었으며, 신성시되었던 모든 것에 거역하여 만들어졌던 결정에 대한 추억 말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처럼 스스로를 새 시대의 사상적 구원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2천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거나 그마저 넘어서는. 그래서 앞으로도 기독교계로부터는 영원히 욕을 먹을 것 같다. 니체는 이렇게 거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과는 지구와 별처럼 떨어진 사색을 했다. 따라서 그의 책을 이해하려면 그의 입장을 상상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처음 읽으면 횡설수설로 들리는 니체의 저작들은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들에게 니체는 정신을 해방시키는 종교의 교주였다.
너는 너 자신의 주인, 또한 네 덕성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예전에는 덕성이 너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도구일 뿐이다. 너는 자신의 의사 결정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 더 높은 목표를 위해서 네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는 모든 가치 판단을 할 때 미래를 지향하고 고려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많은 깨달음을 주는 니체의 말이다. 덕성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정해놓은 것이다. 우리나라 상황을 예로 들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 등이다. 당연하게 정해져 있어서 실제로 옳은지 생각도 안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절실히 깨닫은 목표의식이 없다면 그건 노예의 덕성이다. 왜 공부하는지, 왜 일하는지, 왜 이념을 수호해야 하는지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한다면 결국 허무의 문제가 찾아온다. 높은 목표를 찾으면 노예의 덕성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예전에는 강박이고 피로를 주던 덕성이 이제는 필요할 때 쓰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그 목표의식은 자신의 운명을 찾았을 때만 충족된다.
책의 제목은 ‘행복의 정복’. 지구상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 하고 있다. 월급보다 큰 돈을 들여 여행을 떠나고, 우울증에 약을 먹거나, 술 담배 마약을 취미로 삼고, 목숨걸은 불륜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저자는 행복을 정복한다고 말하고 있다. 딱 자기 기준으로 상담해주는 사람에게 많이 속아보았다면, 혹은 우울에 푹 잠겨있는 사람이라면 제목을 본 순간 냉소할 것 같다.
나 역시 이해심 없는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아 본 적이 있다. 내가 느끼는 고난을 자세히 말해도, 말은 벽에 던진 배구공이 튕겨 나오듯 그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오는 것 같았다.
상대를 판단한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의 차이는 상대에게 애정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대화를 아무리 나누어도 다른 사람에게 위안을 주지 못한다. 반면 자신을 사랑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위안을 널리 퍼트릴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1872년 영국의 명문 백작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디프테리아 감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2년 뒤에는 우울증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기관지염 합병으로 사망한다. 이후 러셀은 조부모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친할아버지 존 러셀은 1878년 세상을 떠났는데, 러셀은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탄 친절한 늙은 신사로 기억했다.
러셀은 공교육에 반대한 할머니 덕분에 집안에서 가정교사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19세기 후반 사상 혁명기에 엘리트 교육을 받는 장점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대인공포증도 키워준다(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니). 백작 할머니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으나, 종교 이외의 부분에서는 진보적이었고 손자에게 사회적 정의에 대한 시각을 심어준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성서 출애굽기의 구절(23:2)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는 러셀의 좌우명도 되었다.
러셀의 사춘기는 굉장히 고독했으며, 몇 차례 자살 충동까지 느꼈다고 회고했다.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수학이 재미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종합하면 영국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양친은 빨리 죽고, 대인공포증과 우울증이 생겼지만 수학 공부하고 싶어서 자살 안 한 특이한 유년기이다. 아픔을 딛고 일어나 훗날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철학자, 수학자, 사회 개혁가가 되고 노벨상 까지 타게 되는 걸 보면 인간 마음의 노력은 정말 많은 걸 가능케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우울 속에서 투쟁하며 행복을 쟁취했다. 너무 우울하면 다른 좋은 사상을 느끼고 이해할 머리도 없어지고, 지쳐서 잠만 자고 싶어진다. 거꾸로 말하면 밝은 마음으로 공부하고, 잠만 자는 게 아니라 즐거운 일에 몰두한다면 행복해진다는 뜻이다. 행복은 분명히 그 길 안에 있고, 사람을 그리로 이끄는 것은 노력과 운명이다. 러셀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심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 길로 들어섰다. 그가 빠져있었던 심리적 소용돌이와 극복 방법들은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서술은 과장되어 있지 않고, 어떤 유형의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지도 않으며, 따뜻한 휴머니즘에 기반해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나니 제목이 전혀 거만하지 않다고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