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못 생긴 채 살아남는 법
인터넷 뉴스를 보면 연예인 사진 수 만 개를 볼 수 있다. 기사 제목은 항상 자극적이다. “XX의 굴욕 없는 뒤태”, “초미니를 입고 계단 오르는 OOO”. 엘리트 지식인인 신문 기자들이 왜 매일 이런 제목을 만드는지 생각할 수 있다. 인터넷 광고 수익은 기사의 클릭 횟수에 비례해서 지불된다. 사이트 방문 횟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본능과 연결되는 기사를 만들어야 한다.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는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주목할만한 실험을 했다. 개한테 음식을 주면서 매번 종소리를 딸랑 냈더니 나중에는 음식을 안 주고 딸랑 소리만 내도 개가 침을 흘리는 것을 발견했다. 파블로프는 이 실험의 성과로 19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어렵지 않고 별로 비용도 안 들 것 같은 이 실험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유는 그 광범위한 적용 가능성 때문이다. 인간의 고차원적 행동이라는 것도 자극과 반응, 거기에 끼어든 조건 형성, 조건 반사가 복잡하게 쌓이고 쌓여서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블로프의 이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광고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강한 자극(예프고 야한 사진)과 동반된 조건 반사(네티즌의 클릭)를 통해 광고사는 수익을 창출한다. 서울 시내를 돌아다녀 보면 연예인 사진이나 성형외과 광고가 없는 곳은 경복궁 같은 유적지 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온 도시를 광고판으로 만들었고 그중 미모는 가장 강한 마력을 지녔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아무 마력이 없는 예쁘지 않은 존재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는 질문에 대한 괜찮은 해답을 준다. 소설의 여자 주인공은 사람들의 주목을 쉽게 끌 만큼 못 생긴 여자이다. 그녀는 추녀가 겪을 수 있는 온갖 치욕과 멸시를 당해왔다. 남자 작가의 글이지만 여자의 아픔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아마도 작가 역시 사회적인 스펙 싸움에서 져서 굴욕을 당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동감을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래는 여주인공의 회고이다.
세상엔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도 많단다, 라고 말하며 사람들은 저의 어둠을 장애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수히… 저를 장애인으로 만들어왔습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저는 분명 세상이 만들어낸 장애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들과 함께 학교를 다녀야 했고, 남들과 비슷한 옷을 입어야 했고… 그리고 언제나 남들과 다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역시나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다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라는 여자의 운명입니다.
어린 시절은… 그랬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제게… 적어도 제게는 언제나 짐승과 같았습니다. 사람을 습격하는 짐승… 배가 고프지 않아도 무언가를 물어뜯는 짐승… 순수한 장난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짐승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아이들이 두렵습니다. 순수한 만큼, 어떤 죄책감이나 거리낌도 없이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이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아이들과 같은 정신연령을 지닌 어른들도 많습니다. 어떤 성자가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해도, 제 삶은 결국 이들과 함께.. 이들에 속해 있어야 했습니다.
작가는 또한 미모 지상주의의 성질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한다. 그것은 본능과 생리 반응에 수반된 결과만이 아니었다. 미모 숭배는 배금주의나 학벌지상주의와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것에 등급을 매기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경쟁시키는 사회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있다(에리히 프롬의 책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움). 소설의 히로인과 히어로는 그런 이념과 싸우며 자신들만의 사랑을 만들어 간다. 아래는 그들이 부서지고 나서 깨달은 생각을 말해주는 남자 주인공의 말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서로를 간호하는 느낌으로 걸어가던 길고 긴 골목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골목… 그저 인생이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불과한 인간들의 골목… 모든 인간은 투병 중이며,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 미운 오리 새끼와 백조
바쁘기만 한 학교와 직장에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모두들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간다. 분명 친한 것처럼 느껴지는 동료가 있지만, 그건 같이 일할 동안만 느끼는 착각일 때가 많다. 직장을 옮기고 공유할 게 없어지면 인간관계는 기능을 다한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사람 얼굴이 꺼지듯 나는 그 사람이 필요한 존재에서 지워져 버린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 냉소에 빠질 필요는 없다. 진심 어린 작가가 쓴 진심 어린 글을 읽으면 세상에는 잇속을 초월한 괜찮은 인간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를 읽으며 영화 게이샤의 추억(Memoirs of a Geisha)이 생각났다. 두 작품 모두에서 어린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 명은 소년이고 다른 한 명은 소녀였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게이샤의 추억의 주인공 치요(오고 스즈카 분)는 딸을 다 키우면 굶어 죽을 형편이던 집안에서 났다. 치요의 부모는 하는 수 없이 치요는 게이샤 집에 하인으로, 치요의 언니는 홍등가에 돈을 받고 판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아버지에게 이런 식으로 버림받은 치요의 마음은 많이 아팠을 것이다. 게이샤 집에서도 학대 받으며 하녀 일을 하던 중 이와무라 회장(와타나베 켄 분)을 만난다.
그는 길거리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던 소녀 치요를 발견하고는 빙수를 사주며 위로의 말을 해준다. 지금은 울고 있지만 커서는 훌륭한 게이샤가 될 것이라고(게이샤는 일본에서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미모와 교양을 갖춘 예능인의 위치에 있었다). 그 순간 희망 없이 살아가던 소녀는 하나의 꿈을 품는다. 치요는 회장에게서 받은 돈을 손에 쥐고 천 개의 주(朱)색 기둥이 늘어선 길을 달려 신사로 간다. 한 달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동전을 전부 신전에 바치고는 진심을 다해 기도한다. 꼭 게이샤로 성공해서 회장을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주인공 제제는 뽀르뚜가(마누엘 발라다리스)를 만나면서 비슷한 감격에 젖는다. 빈민가 소년인 제제는 싸움만 일삼아 가족들로부터 검은 양 취급을 받았다. 제제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사소한 잘못에도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뽀르뚜가는 그의 거친 행동 이면에 애정을 갈구하는 순수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본다. 집 뒤 뜰에 있는 라임 오렌지 나무를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대화를 하는 것도 소통 할 수 있는 사람을 그리워해서 보인 행동이었다.
제제의 인생은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사랑해주었던 뽀르뚜가로 인해 완전히 변한다. 미운오리새끼는 백조가 되었고, 처음 받은 사랑은 감격스러워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작품은 이제 48세의 어른이 된 제제가 죽은 뽀르뚜가를 그리움에 회상하며 말을 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눈물 없이 읽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모사세 XIII – 노니는 바다
바다는 파랑도에서 해녀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녀가 엄마 없이 살아갈 아기를 얼마나 걱정했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물은 파도치며 거품을 만들고 짠 내음을 흩뿌린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의 슬픔과는 관계가 없다. 여인이 죽은 다음날 파도는 전일과 다름없이 오고 갔으며 여인을 나른하게 했던 햇빛도 똑같이 내리쬐었다. 죽은 몸이 물 위에 떠 있는 것 만 다른 점이었다. 인간이 사고하는 것과 자연이 노니는 모습의 차이이다.
어른이 된 정인은 외할머니의 집 안에서 역할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건 마치 가구와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꼭 필요한 기능을 해주고 있지만 아무도 그녀의 기분을 걱정하지 않았다. 어린 손자 손녀들은 어린이 특유의 무신경함과 잔인함으로 할머니를 대했다. 항상 일에 바쁜 사위와 안팎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딸은 마음에 위로가 안 되었다. 하지만 수 십 년에 걸친 가사와 육아를 외할머니는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불평의 말을 한 적도 없다. 이렇게 의무에 충실했지만 그녀의 개인적인 욕망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어린 정인은 욕망에 민감한 개체였다. 엄마 눈길을 피해 노는 데 특히 그랬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탐심(貪心)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할머니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게 아니란 걸 정인은 느낀 적이 있다.
그때 정인은 외할머니와 둘이서 마루에 앉아 옛날 사진 앨범을 펼쳐 보고 있었다. 거기엔 주로 정인의 아기 사진들이 있었지만 간혹 어머니의 처녀 때 모습이라든지, 할머니의 아줌마 시절 사진도 있었다. 역시나 외할아버지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자신의 40대 시절 독사진을 무언가 애틋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면서 “이땬 나가 아적 갼찮았는디…” 라고 했다.
정인은 서울 말씨를 쓰지만 제주도 사투리는 다 알아들었다. 할머니는 “이때는 내가 아직 괜찮았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손자가 보기에 40대 할머니는 할머니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아줌마 같았고 여자로서 매력이 풍기지는 않았다. 일년 365일 입고 다니던 몸뻬 바지와 꽃무늬 블라우스를 착용하지 않고 시골풍 정장을 입은 게 큰 차이점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분명 예뻐 보이고 싶고 치장하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지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마음에 손자 정인을 포함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게 슬픈 사실이었다. 이렇게 욕망과는 상관없이 집안의 식모처럼 살았던 가여운 외할머니는 긴 세월이 흐르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녀를 그렇게 바꾸어 놓은 건 이번에도 자연이었다.
달과 6펜스 – 광기와 열정의 달
인생이 컨베이어 벨트 위를 흘러가는 물건 같다는 느낌이 든 적이 있다.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타성적이다. 트랙 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었다. 나는 대학생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고 국가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3개월 정도 되는 시험 준비 기간 내내 집 밖을 나가지 않고 혼자 공부를 했다. 공부를 시작 했을때 공기는 따뜻했고 창 밖의 나뭇잎은 초록색이었다. 두어달이 지나자 차가운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왔고, 갈색으로 마른 잎새들이 마음을 아주 울적하게 만들었다.
시험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했었다. 이건 네 미래를 위한거야. 내 꿈을 위한 거야. 하지만 그런게 무슨 의미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살면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감사의 꽃다발을 받지도 않는다. 신이란 존재는 보이지 않고 누군가가 확실하게 증명해 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품은 갈망은 정당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은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청춘을 넘어선 사람으로, 안정된 사회적 지위와 아내와 그리고 두 아이까지 있는 증권 중개인이다. 내 나이에 화가를 지망했다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그가 화가를 지망한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솔직해지고 싶었다.
“물론 기적이 일어나는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대화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런 가능성은 만에 하나입니다. 고생만 죽도록 하고 아무 결실도 없이 결국 단념해야 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을 게 아닙니까?”
“그래도 나는 그리지 않을 수 없소” 그는 되풀이했다.
“그럼 당신이 앞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삼류 화가로 그친다면, 그래도 모든 걸 버린 만큼의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정말 당신은 바보로군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뻔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 바보라면 뭐 할 말은 없겠지만”
“그러니까 그리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고 하지 않았소. 이 마음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거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를 따지고 있겠소? 어떻게 해서든지 물 속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애 쓸 것 아니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의 구절이다.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의 삶을 모태로 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중년의 나이에 안정된 증권거래소 중계인의 자리를 버리고, 아내와 자식들도 같이 내버려두고 가난한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아내는 남편이 젊은 여자와 바람나서 다른 나라로 떠난 걸로 생각하고는 한 젊은이(작품의 화자)를 보내 남편을 찾게 한다.
화자는 사회적 상식을 논거로 삼아 스트릭랜드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그는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는 그림이 주는 미(美)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 그건 예쁜 여자에게 빠진 것처럼 확고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혹은 스트릭랜드가 말한대로 물에 빠져 살기 위해 허우적대는 사람과도 같았다. 안 그러면 죽기 때문에(그림을 안 그리면 너무 괴로우니) 노력하는 것이다.
아무튼 가을 바람이 차가웠던 외로운 날 나도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 이념, 혹은 늘 절실한 감정이 쏠리는 방향은 정해졌기 때문에 그걸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밥 먹는 것을 아무리 미루어도 결국에는 먹을 수 밖에 없는 것 처럼 그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화웨이, 새로운 삼성 II
화웨이의 설립자 런정페이는 1944년 중국 구이저우성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중학교 교장, 모친도 교사였던 교육자 집안이었다. 부모의 교육열 덕분인지 명문 충칭건축공정학원(현 충칭 대학교 공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교 3학년이던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중국 전국을 휩쓴 이 난리로 학교는 문을 닫고 학생들은 사상 투쟁 시위를 하러 몰려나갔다. 런정페이의 부친은 국민당을 위해 부역했던 경력으로 인해 홍위병들의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런정페이는 “기억해라. 지식은 힘이다.” 라고 당부했던 아버지의 염원대로 독학에 열중했다. 대학시절 그는 전자 기술 이외에도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의 사상을 연구한다. 아래는 그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
런정페이는 암울했던 대학시절에 마오쩌둥 사상을 깊이 연구했다. 이는 엔지니어로서 상대적으로 경영전략에 취약했던 런정페이가 화웨이를 키우는 강력한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화웨이의 연구와 기술 개발에는 마오쩌둥 사상의 ‘우수한 병력을 집중시켜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한다’ 는 전략이 적용되었다. 또 자기반성과 사내 캠페인 등, 그동안 화웨이의 발전과정에서 드러난 중대한 정책에도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마오쩌둥 사상이라고 하면 소수의 운동권 사람만 읽는 공산주의 정치이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런정페이가 경영 지침으로 사용했던 건 마오쩌둥의 군사 전략이었던 것 같다.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국공내전(1946~1949년)은 2천여 년 전의 초한전(楚漢戰)과 비슷했다. 항우는 유방을 훨씬 능가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마음대로 그를 죽일 수 있던 때도 있었다(홍문지연 鴻門之宴). 하지만 유방은 항우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무너뜨렸다. 항우가 정공을 걸 때는 지연전과 유격전을 벌였고, 상대 진영을 이간시키는 책략도 필사적으로 사용했다.
마오쩌둥도 유방과 마찬가지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전쟁을 이겼다. 전쟁 발발 당시 병력은 국민당군 430만 명 대 공산당군 120만 명으로 4배 가까이 차이가 났고, 국민당 측은 베이징, 난징, 상하이, 광저우 등 주요 도시와 공업 중심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군사 장비에 있어서도 태평양전쟁 종전 후 미군의 잉여 무기를 넘겨받은 장제스 측이 유리했다. 공산당군은 해군과 공군이 없었고, 소총으로 무장한 수많은 보병이 주력이었다.
미국은 물론, 같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도 마오쩌둥의 승리에 회의적이었다. 스탈린은 1945년 7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장제스 정부의 외무장관 송자문(宋子文)과 회담하고 중소 우호 동맹 조약(Sino-soviet Treaty of Friendship and Alliance)을 체결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해 권력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예상을 뒤집고 공산군은 불과 4년 만에 장제스의 군대를 붕괴시키고 중국 전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특유의 게릴라(빨치산) 전술을 썼는데, ’16字 전법’이라고 불리는 전술이다.
敵進我退 적이 공격하면 후퇴
敵駐我擾 적이 멈추면 교란
敵疲我打 적이 피로하면 공격
敵退我追 적이 후퇴하면 추격
병력에서 앞설 때만 공격하고 필요 없이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준비 없이 싸워서는 안 되며, 승산 없이 싸워서도 안 된다.
농촌을 장악한 후 도시를 포위 공격, 섬멸한다.
화웨이가 경쟁 기업과 싸워온 과정도 빨치산 전쟁과 비슷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겼던 것이다. 화웨이는 기술력과 브랜드 명성이 있는 다국적 기업이 진출하지 않은 시골 지역에서 먼저 기반을 쌓았다. 본토 기업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후 지원 서비스에 정성을 다했다. 경쟁입찰, 계약에 이르기까지 화웨이는 반드시 경쟁기업보다 많은 인력과 자금을 집중 투입해서 돌파구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은 단지 우수한 전술의 성과만은 아니었다. 아래는 <위기를 경영하라> 책에 실린 예화이다.
…영업사원들이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해 각종 제품이 소개된 자료와 샘플을 둘러메고 밤낮으로 뛰어다녔지만, 1년 동안 전국 500여 현(縣)을 훑고 다녔음에도 주문량은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한 번은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 지역인 이춘 전신국과 계약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절박했던 런정페이는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영업사원뿐 아니라 수석연구원들까지 총출동시켰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에서 6개월 동안 머물며 기술교류, 프로세스 점검, 설비 테스트 등을 수십 차례나 거듭했다. 마침내 최종 입찰을 하던 날, 그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내심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그들은 어찌나 속이 상했던지 체면도 잊은 채 고개를 떨구고 통곡했다고 한다.
예화에서 보이듯 화웨이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헌신은 눈부실 정도이다. 장군(경영자)의 전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걸 실행하는 병사(직원)들의 사기가 없다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 이렇게 계약을 못 따면 통곡까지 하는 특별한 기업 문화는 특별한 소유구조로부터 왔다.
‘여러분은 회사의 주인’ 이라는 팻말만 있고 실제 번 돈과 주식은 회장 가족들이 독점하는 회사가 많다. 반면 화웨이는 경영자와 종업원들이 회사의 주식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종업원 지주제(Employee Shareholding Plan) 회사이다. 그래서 직원의 꿈이 회사의 꿈이 되고, 회사의 목표가 직원의 목표가 되는 응집력 강한 조직을 일구어 냈다. 직장에 야전침대를 깔아 놓고 야근을 하고, ‘화웨이 늑대’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분투하는 정신은 제도에 기반한 충성심에서 왔다. 중국 기업에 대한 흔한 편견을 깰 만한 우수한 기업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화웨이, 새로운 삼성 I
1970년대 빌 게이츠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고, 그 예측은 부를 안겨주었다. 퍼스널 컴퓨터(PC)라는 단어도 없던 시절, 전 세계 집과 회사 마다 컴퓨터가 쓰이게 될 모습을 상상했고, 독점 운영 소프트웨어를 만들려고 했다. 회사 이름은 작음(Micro)과 소프트웨어(Soft)를 결합한 Microsoft 로 지었다. 비슷한 시기의 스티브 잡스도 미래 IT 시대를 잘 예견했고, 회사의 로고로 생각의 혁신을 뜻하는 뉴튼의 사과 그림을 택했다.
1987년 런정페이(任正非)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퇴직 장교로 43세 였다. 애국 군인 답게 어려운 상황에도 중화유위(中華有爲), 즉 “중화민족에 미래가 있다” 고 외치며 분투했다. 그리고 그 말을 줄인 ‘화웨이’ 를 사명(社命)으로 한 회사를 설립했다. 설립 당시 자본금은 2만1천 위안(우리돈 360만원), 작은 작업실에 6명의 직원이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이 미국 특유의 개인 창의성을 강조했다면, 화웨이는 국가주의적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설립자의 개인 이력도 차이가 많이 난다. 빌 게이츠는 시애틀 명문가 출신에 변호사 아버지를 두었고, 중퇴하긴 했지만 하버드 대학 입학생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입양아 출신이지만, 리버럴 아트 분야에서 유명한 리드 대학교 중퇴에 스티브 워즈니악 같은 천재 엔지니어를 동업자로 두는 행운을 누렸다. 한 명은 고급 인텔리로서 혁신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히피 예술가 기질을 가지고 혁신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런정페이는 40대 중반 퇴직 군인 신분으로 화웨이를 설립했다. 군대에서 통신장교를 지냈던 것이 IT와 연결되는 유일한 경력. 게다가 당시 중국은 IT 변방국이어서 정보통신의 혁명을 체감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런정페이와 화웨이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성공을 이루었다. 화웨이는 현재 연매출 50조원 규모의 거대 IT 기업이다. 2010년에는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2014년에는 톰슨로이터 선정 세계 100대 혁신 기업이 되었다.
중국 로컬기업에서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한 샤오미나 화웨이 같은 기업들은 쉽게 과소평가 당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 내수 시장의 엄청난 크기 덕분에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화웨이가 그 내수 시장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미 일류 통신 기술을 보유하고 중국에 진출해 있던 에릭스, 지멘스, 알카텔 같은 글로벌 기업과 경쟁해야 했고, 중흥통신(ZTE) 같은 중국 내 라이벌과도 싸워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쉽게 보이지 않으며 정당하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먼저 화웨이와 런정페이는 그들만이 쓸 수 있는 기업 전략을 사용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은 최첨단 기술력에 디자인 요소와 유저인터페이스를 가미해 독점 시장을 만들어 냈다. 제 3세계 기업으로 통신회사 후발주자였던 화웨이는 최첨단 기술력도 없고, 디자인을 신경쓰는건 사치였다. 결국 경쟁자인 다국적 기업에 앞설 수 있는 로컬 서비스에 중점을 두었다. 아래는 양사오룽이라는 저자가 런정페이와 화웨이의 발전을 분석한 <위기를 경영하라>라는 책에서 옮긴 내용이다.
그들(다국적 기업들)은 자신들의 핵심기술만 믿고 고객관리를 소홀히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각 지역 전신국과 거래할 때에도 최고 책임자 외에는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웨이는 그렇지 않았다. 런정페이는 직원들에게 거래처에서 만나는 사람의 직무나 직책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화웨이 사람들은 제품 생산과 판매, 경쟁입찰 그리고 계약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에서 만나는 모든 담당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최고 책임자, 사무직원, 수석 엔지니어, 테스트 엔지니어 등 접촉하는 모든 고객들이 존중받는다고 느끼도록 했다. 이런 자세는 나중에 해외시장에서도 계속되었다.
창업 초기, 화웨이는 중국기업을 육성한다는 취지에서 중국 우전부의 간부 및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큰 도움을 받은 런정페이는 이들이 퇴직한 후에도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마케팅 부서에 화웨이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분들이니 수시로 찾아가 안부를 묻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우라고 당부하고 매년 기념일을 챙겨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퇴직자들은 인연을 소중히 하고 감사할 줄 아는 런정페이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런정페이는 상대 회사의 강점과 약점을 잘 파악했고, 화웨이의 장단점 역시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 평가에 따라 이길 수 있는 방식으로만 철저하게 싸웠다. 손자병법 모공편(謀攻篇)에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를 연상시킨다. 손자병법 말고도 기업가 런정페이를 감화시켰던 다른 사상도 있었는데 다음 글에서 연결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