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I – 난장이와 도도새의 투쟁
대학생 시절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책을 처음 읽고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 충격은 짜릿한 게 아니고 음울하고 야릇한 느낌의 충격이었다. 보통의 소설과 다르게 이야기 흐름과 시점이 뒤죽박죽 되어 있고 무대는 70년대 수도권 빈민촌이지만 동화책에 나올 만한 상황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게다가 서술이 건조하고 간결하지만 서정적인 느낌이 난다. 이를 테면 아래와 같은 문단이다.
“나는 도도새다.”
지섭이 말했었는데, 윤호는 이렇게 근사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형, 도도새는 어떤 새지?”
“십칠 세기말까지 인도양 모리티우스 섬에 살았던 새다. 그 새는 날개를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날개가 퇴화했다. 나중엔 날을 수가 없게 되어 모조리 잡혀 멸종당했다.”
도도새(Dodo Bird)는 서양의 대항해 시대 이후 행해진 인간의 미개지 훼손으로 발견된 지 180년 만에 완전히 사라진 새이다. 힘 없는 동물을 멸종으로 몰아넣은 인간의 잔인성을 상징한다. 작품 속 지섭은 빈민 노동자들에게 연민을 품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 지식인이다. 스스로 도도새라고 하는데, 날개가 없어 걸어다닐 수 밖에 없지만(사회적 힘이 없음) 그 처지로나마 투쟁하는 자신의 상황을 빗대었다. 싸우지 않는다면 도도새처럼 멸망하고 말 것이다.
12편의 단편 소설이 묶어진 이 작품은 각각의 단편이 독립적인 이야기를 진행하면서도 등장인물과 사건이 계속 중첩되면서 나아간다. 첫 번째 단편인 ‘뫼비우스의 띠’ 와 마지막 단편인 ‘에필로그’ 는 수미상관적이며 동시에 액자식 구조이다. 먼저 한 고등학교 교실에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있고 그들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한 교사가 나와서 꼽추와 앉은뱅이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에필로그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꼽추와 앉은뱅이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고 작별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이런 구조는 난장이와 도도새, 머리카락좌 같은 표현과 함께 소설의 환상적이고 슬픈 분위기를 잘 구현한다.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상기는 첫 단편에서 학생들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교사가 한 말이다.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 즉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되게 하는데 쓰이곤 한다. 그 같은 상황이 소설 안 판자촌 철거 소동에서 보여진다. 1971년 실제 있었던 경기도의 ‘광주 대단지 사건’ 이 배경이다. 당시 서울은 산업화로 인한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판자촌이 과포화된 상태였다. 정부는 이걸 정리하기 위해 판자촌 주민들을 경기도 광주의 허허벌판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거기에 동조해 가난한 사람들은 집단 대이동을 해서 황무지에 판자집을 새로 만들고 삶을 꾸려나간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토지 개발 붐을 타고 재개발이 추친되고 구청에서는 철거 계고장이 나온다. 계고장의 내용은 지었던 집을 자진 철거하고 떠나야 하며 만약 자진해서 않으면 ‘주택 개량 촉진 임시 조치법’ 에 따라 강제 철거 하고 그 비용도 판자집 주민이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개(疏開)되는 사람들에게 아파트 입주권이 배분되긴 하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그들은 아파트 살 돈이 없어서 판자촌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판자촌을 불도저로 밀고 정리된 땅에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들어와 돈을 번다. 그들과 공생하는 부패 관료들은 법을 강조한다. 이럴 때 ‘법’ 은 기득권자를 위한 차가운 도구로 쓰인다. 아래는 난장이가 철거에 대해 자식들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시에서 아파트를 지어 놨다니까 얘긴 그걸로 끝난 거다.”
“그건 우릴 위해서 지은 게 아녜요.”
영호가 말했다.
“돈도 많이 있어야 되잖아요?”
영희는 마당가 팬지 꽃 앞에 서 있었다.
“우린 못 떠나. 갈 곳이 없어. 그렇지 큰 오빠?”
“어떤 놈이든 집을 헐러 오는 놈은 그냥 놔두지 않을 테야.”
영호가 말했다.
“그만둬.”
내가 말했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
키르케고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I – 실존주의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사상의 시조로 불리고 있다. 이전의 근대적 합리주의와 확연히 구별되는 사상을 처음 전개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가 어떻게 다른 사상인지 위키 백과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실존주의(實存主義, 프랑스어: Existentialisme)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조금 추상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운명의 주인’ 이라는 말은 참 맘에 들었었다. 일단 내게 어떤 운명이 있다는 것이 새롭고, 내가 그 운명의 주인이 된다는 건 꿈꾸며 살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를 정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가 한 말을 또 참고해보자. 그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본질(本質)이라는 건 본래가 되는 성질 혹은 가치이다. 그런데 이 가치는 사회에 의해서 정의된다. 본질이라고 통용되려면 다수의 동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연장선으로 삶의 본질이라는 것도 사회에 의해 정의된다. 우리나라는 유교 전통이 강한 곳이니 출세와 지위가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스스로 돌이켜봐도 어려서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하고, 선생님이 좋은 대학가라고 해서 대학가고, 다 크니 주위 사람들이 선망하는 위치를 찾으려 노력했던 삶이었다. 즉 삶 대부분이 운명이라는 말을 쓸 가치가 없게 타성적이었다. 이런 타성이 지속되면 편견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로봇이 되어버린다. 반면 실존(實存)은 실제가 되는 존재이다. 실존을 찾기 위해선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남들이 뭐라든 신경 안 쓸 용기가 필요하다. 남들의 의견도 어차피 사회의 통념이고 강요된 운명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경건하지만 사색적이고 우울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덕분에 뛰어난 사고 능력을 키운 것 같다. 고독과 소외감에 고생하다보면 신선한 꿈을 찾게 마련이다. 1835년의 여름방학, 젊은 22세의 대학생인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을 떠나 셸란(Saeland)의 북부를 두루 여행한다. 그는 북 셸란의 최북단에 있는 길레라이레(Gilleleije)란 마을에 이르렀고, 장엄한 해협의 물결이 보이는 절벽 위에 서서 사색에 잠겼다. 압도적인 자연 경관의 도움인지 그는 예지의 절정을 경험한다. 키르케고르는 마침내 자기의 사고와 생존의 결정적 근거를 찾아내었다고 하는데 아래가 그의 말이다. 실존주의 사상이 담긴 서사시 같다.
나에게 참으로 없었던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었다. 내게 없었던 것은 결코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 어떤 행위에도 일정한 인식이 앞서야 하므로 인식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내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가 참으로 무엇을 하기를 원하고 계신가를 아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내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죽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이념(Idee)을 찾아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이른바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낸들 그것은 나에게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인식의 명령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며, 또 그 명령을 통해서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 명령이 내 안에 생생하게 집어넣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지금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것이 내게 없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이미 집도 얻고 가구도 장만했지만 거기서 인생의 희비를 같이 나눌 연인을 아직 찾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과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내게 없었던 것은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사상 전개를 결코 내자신의 것이 아닌 것 위에, 즉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 위에 세우지 않고 내 생존의 가장 깊은 뿌리와 맺어져 있는 것 위에, 즉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신적(神的)인 것에 뿌리박고 있으며 비록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하더라도 굳게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것 위에 세우게 될 것이다(진리란 Idee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내가 찾아온 자기를, 나의 혼을 얻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자신을 알도록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gnothi seauton). 사람이 평안함과 의의를 얻는 것은 그가 자기자신을 내면적으로 이해하고 자기의 길을 찾았을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길은 절망이라고 하는 저 따분한 저주 받은 동행자 곧 삶의 이로니를 면할 길이 없다. 내면적 근거가 없는 사람은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 몸을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나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The thing is to find a truth which is true for me, to find the idea for which I can live and die.
앳된 청년이었던 키에르케고르의 이 깨달음은 실존철학의 탄생을 의미했다. 나와 상관 없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발견하는 것,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죽기를 원하는 이념을 찾는 것이다. 타성적 삶을 사는 것은 안락한 가구가 있는 집에 사랑하는 연인 없이 사는 것처럼 맥 빠진 일이다. 하지만 실존을 찾아 사는 것은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연인 – 키르케고르의 경우 레기네 올젠의 이미지가 투영됨 – 과 같이 사는 것이다. 이것이 키르케고르 스스로 불안과 우울이 엇갈리는 생 한가운데서 찾아낸 진리였다.
키르케고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 – 첫 사랑, 레기네 올젠
옛날 재미있게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 문고판 책의 표지에는 ‘한 순간도 잊지 못한 첫 사랑의 기억’ 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말은 메아리처럼 마음을 울렸었다. 첫 사랑이라는 존재는 정말로 실제적이지만(그리움을 간절히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기루 같다(소유해서 내 옆에 둘 수 없으므로). 실존주의의 시조로 불리는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 (Søren Aabye Kierkegaard : 1813~1855)에게서 처음 연상되어 떠오르는 단어는 ‘첫 사랑’ 이다. 그가 첫 사랑을 만난 후 어떻게 그걸 지켜 갔는지를 본다면, 이 남자를 개츠비 못지않은 순정파로 여길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25세가 되던 해 14세 소녀 레기네 올젠(Regine Olsen)을 만난다. 이 둘은 즉각 서로에게 끌렸던 것 같으며 키르케고르는 계속 그녀 곁에 맴돌다가 3년 후 드디어 청혼한다. 그렇게 쇠렌과 레기네는 1년 간 약혼 상태로 있었다. 이 시기 그가 약혼녀에서 쓴 편지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정말 감동적인 연애편지였다. 하지만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남자의 마음 속에는 어떤 천사적이면서 악마적인 절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너무 귀엽고 어린 여자(레기네 사진 링크)를 사랑하고 있고, 약혼녀 역시 그를 깊이 사랑하는데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던걸까? 이걸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가정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키르케고르는 북유럽의 작은 나라인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모직상인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키르케고르는 세 번째 부인의 막내아들이었는데, 그래서 부모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 미카엘 페데르센(Michael Pedersen Kierkegaard)은 우울하고, 걱정이 많으며, 종교심이 깊으면서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왠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주인공 성격 같다). 아버지는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자기의 죄를 남김없이 고백하고 싶었는지, 아직 성인이 안 된 키르케고르에게 비밀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 번째는 자신이 젊은 시절 황야에서 목동 일을 했는데, 추위와 배고픔에 몸서리친 끝에 하나님을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키르케고르의 어머니는 집안의 하녀였고, 그녀와 혼전 간통으로 태어난 아이가 키르케고르라는 사실이었다.
키르케고르는 아버지의 이 대담한 고백을 듣고서 너무나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훗날 ‘대지진의 체험’ 이라고 했는데, 사람의 정신이 지진 난 땅 처럼 마구 흔들리는 광경을 상상해보면 그가 받은 충격의 정도가 잘 느껴진다. 아버지는 자신의 죄 때문에 집안 사람들이 33세(예수 그리스도가 살다간 나이) 이상 살 수 없는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어머니는 아들이 22세 되던해 일찍 죽었고, 나머지 7남매 중 대부분이 어린 나이로 죽었다. 33세 이상 생존한 것은 키르케고르 자신과 형 페테르 뿐이었다.
키르케고르는 자기는 어짜피 서른 세 살 때 죽을테고, 천성적으로 어두운 성격 때문에 약혼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고 굳게 믿는다(근데 처음부터 그녀에게 접근은 왜 한걸까…). 레기네 올젠은 심적 절망에 빠진채 약혼남의 마음 돌려보려 노력한다. 이들의 약혼 소동은 코펜하겐 사람들이 모여 나누는 뒷말의 주요 소재가 될 정도여서 당시 레기네의 말과 행동은 기록으로 잘 남겨진 부분이다. 그녀는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충격’ 에 빠졌으며, 자신을 다시 돌보아 주지 않는다면 자살해 버릴 거라고 키르케고르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녀는 자신을 잊어야만 행복해 진다는 확신으로 일부러 차갑게 반응한다. 어차피 결혼해보야 몇 해 못 가서 당신보다 더 젊은 여자에게 빠지게 될 거라는 둥 정 떨어지는 말을 하면서.
결국 이 약혼은 서로에게 절망을 안긴채, 일 년만에 파혼으로 끝났다. 레기네는 나중에 요한 프레데릭 슐레겔(Johan Frederik Schlegel)이란 남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여전히 그녀를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사랑했다. 첫 사랑은 그 강도의 변함 없이 평생 이어졌지만, 형태는 그 모양을 바꾸었다. 여자에 대한 사랑이 어떤 신적인 존재에 대한 간구로 바뀌었던 것이다. 죽은 베아트리체를 그리워하며 <신곡>을 썼던 단테가 연상된다. 실연의 기억이 결정적인 화학 반응을 일으켜 실존주의 철학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다음 글에서 이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 오사카의 영화도 꿈 속의 꿈
아시가루(병농일치의 최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닌의 난 이래 100년 이상 지속된 일본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천하인(天下人)이 된 인물. 세계사를 두고 보아도 평민 출신으로 이 정도 출세를 한 사람은 중국 한고조 유방(劉邦)이나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혹은 로마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Vespasiānus) 정도가 떠오른다. 일본에서는 “戦国一の出世頭(전국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로 일컬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센고쿠 시대(1467~1573) 오와리의 영주였던 오다 노부나가 아래서 군사, 행정적 실무 능력에서 두각을 나타내 일개 병사에서 주요 방면군 사령관이자 석고 50만석의 대 다이묘의 위치까지 이르렀다. 어려서 보따리 행상을 하는 등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병사와 평민들의 심리를 잘 이해했고 이를 통해 전투 지휘 뿐 아니라 대규모 공병, 병참 작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히데요시의 주군인 노부나가는 자유무역을 보장하여 영지의 부를 축적하고, 신무기 뎃포(조총) 부대를 밀집대형으로 운용하는 등 혁신적인 전략전술을 사용해 통일 전쟁을 벌였다. 하찮은 보병 출신인 히데요시나 군소 호족의 아들인 타키가와 카즈마사의 능력을 알아보고 군단장까지 진급시키는 등 용인술도 뛰어났다. 노부나가는 일본 전국의 반 정도를 정복할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포악하고 거침없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몇몇 부하들에게 원망을 산다. 열 받은 부하 중 한 명인 아케치 미쓰히데는 1582년 일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모반사건을 일으킨다. 미쓰히데는 주고쿠(일본 혼슈의 최남단)로 원정을 떠나기 위해 자기 영지에 동원되어 있던 대군의 방향을 돌려서 노부나가를 습격했다. 소수의 호위 인원만 거느린 채 교토 혼노지에서 머무르던 노부나가는 미쓰히데 군에 포위되어 할복 자살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다.
천하인이던 노부나가와 그의 후계자였던 큰 아들 노부타다가 혼노지의 변으로 나란히 죽음을 당하자 오다가는 권력의 진공 상태에 빠진다. 노부나가에게는 죽은 노부타다 말고도 장성한 아들이 여럿 있었지만 결국 권좌을 다투게 된 것은 대군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선의 군단장들이었다. 히데요시는 우선 미쓰히데의 군대를 무찔러야 했다. 미쓰히데에게는 주군을 살해한 역신이라는 오명이 덧씌워져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 입장에서 동맹군을 모으기 좋았다. 그는 미쓰히데 군의 2~3배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시켜 속도전(速度戰)을 걸었다. 결국 야마자키 전투 한 번으로 자신과 대등한 오다 가문 군단장이던 미쓰히데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주군의 원수를 갚음으로서 히데요시의 명성은 드높아졌고, 그는 오다가 전체의 군권을 잡기 위해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과 연합한 동료 장군 시바타 가쓰이에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시즈가타케에서 벌어진 전투 한 번으로 가쓰이에를 멸망으로 몰아넣는다. 이 전투에서도 히데요시는 사전 외교의 능수능란함과 야전 지휘의 민첩성을 보여주었다.
야마자키와 시즈가타케 두 번의 싸움으로 히데요시는 오다가의 최고 실력자이자 일본 국토 반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로도 기세를 몰아 유력 다이묘(大名;봉건영주)들인 도쿠가와, 모리, 우에스기, 시마즈, 호조가를 차례차례 굴복시켰다. 오사카에 거성을 축조하고 천하인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때 히데요시의 관직은 주군이었던 노부나가를 넘어 천황 조정 최고직 간파쿠(関白)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에 이르렀다.
여기까지에 만족해 멈추었다면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도 출세의 교본이 되는 영웅이 되었겠지만… 나이 55세가 되던 해 임진왜란을 일으킴으로서 국제적 악명을 널리 알리게 된다. 히데요시는 현해탄을 건너 조선을 점령하고 이어 명나라 전체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당시 세계관에서 중화를 지배하는 명나라는 세계의 중심이자 천조국(天祖國)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히데요시가 연전연승했던 데에는 병력, 병참상의 우위를 확보하고 이길 수 밖에 없는 전쟁을 상대에게 강요한 데 있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 명나라에게 싸움을 거는 것은 병력 수나 보급 상황면에서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무모하게 시작된 전쟁은 영토 한 뼘 얻지 못하고 조선 파견 군대 전원을 일본으로 철수시키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57세의 나이로 후계자인 아들 히데요리를 얻었다. 히데요시 자신이 주군 노부나가의 죽음 후 그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자기가 죽고난 후 부하 누군가가 어린 히데요리를 물리치고 정권을 빼앗을거라는 걱정을 안할 수 없었다. 나름의 안전대책을 마련했으나 그의 사후 걱정은 그대로 현실이 된다. 죽음에 앞서 출세와 인생의 허무함이 잘 담겨있는 사세구(辭世句)를 남겼다. 향년 62세.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나니와 1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Notes:
- 오사카 인근의 옛 지명 ↩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 이라는 대란대치 大亂大治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인류사 전체를 두고 살펴봐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대란(大亂)이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이어진 이 혁명에는 미증유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거대한 중국 사회 전체의 사고와 생활방식이 뒤흔들려 버렸다.
문화대혁명이 발동될 당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인한 경제적 파국으로 국가주석 지위를 사임하고 2선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피땀흘려 이룩한 공산주의 중국의 사상이 변질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당중앙의 최고 지도자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성과제를 인정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했는데, 이건 마오에게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로 되돌리는 위험한 수정주의로 보였다.
마오쩌둥은 권좌를 되찾고 ‘순수한’ 공산주의 노선을 집행하려 했는데 그가 권력 쟁취 수단으로 삼은 건 특이하게도 군대나 총도 아니고 수뇌부 내의 파벌 싸움도 아닌(결과적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무수한 젊은 홍위병들을 동원한 권력 외곽으로부터의 시위 투쟁이었다. 마오는 공산당 최고 지도자였을 뿐아니라 역대 8번째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영웅으로 위광(威光)을 당내에서 견줄자가 없었다. 그가 젊고 덜 여문 홍위병들을 대량으로 불러모아 사상적 열기를 주입시키니, 이들은 전국을 누비며 낡은 관습을 때려부수는 운동을 벌였다.
마르크스 사상은 무신론을 주창하지만 그 정서적 영향력은 기성 종교와 아주 흡사하다. 해방자가 되서 싸우라는 슬로건은 대중에게 어떤 열광심을 불어넣는데, 그렇게 각성된 인민들은 종교집회에 모인 신앙인처럼 행동한다. 문화대혁명 때의 홍위병이 딱 그랬다. 타도 대상이 되었던 것은 4개의 낡은 것(四舊)으로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이었다. 그리고 이런 낡은 습속을 가진 걸로 보이는 사람은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마오가 자기 노선을 거역한 당 지도자로 여겼던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더화이 등이 집단 난리 통에 중앙부 권력으로부터 손쉽게 제거되었다.
당시 국가주석이던 류사오치는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조직가로 강직한 서생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폭력 학생(홍위병)들로부터 ‘수정주의의 두목’,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 로 성토당하며 정치 권력은 물론 일신의 자유도 잃었다. 홍위병들은 자택을 무단으로 수색 했고, 그를 강제로 비판대회에 끌어다 놓았다. 집회에 모인 대중 앞에서 ‘제트기’ 자세를 한채 얻어맞았는데, 류사오치의 어린 자식들은 부모가 맞는 것을 억지로 지켜보아야 했다. 1968년 당은 류사오치에 대한 영구추방을 승인한다. 1969년 베이징에서 하남 개봉으로 이송되었는데 벌거벗겨진채 군용담요에 말려서 들것에 실려왔다. 한 때 중국의 국가 수반이던 인물이 짐짝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후 콘크리트 창고에 감금되었는데, 결국 폐렴이 생겼고 고열과 구토가 끊이지 않았다. 담당 의료진들은 당이 숙청한 인물을 돌보는게 두려웠는지 제대로 된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 류사오치는 1969년 11월 사망한다. 향년 71세. 다른 지방으로 추방된 상태였던 그의 부인과 자식들은 사망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문혁으로 박해받은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라오서는 항일 경력이 있는 문학작가였다. 중국 하층민의 애환을 묘사한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서방 세계에도 문명이 있었던 그는 당시 67세 였다. 10대 후반이던 베이징 제2, 12, 23, 63 중학교(중고교에 해당)학생들과 중앙예술학원 학생들은 이 노작가를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구타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라오서는 홍위병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이들이 씌운 ‘흑색 우파분자’, ‘괴물’, ‘반동학자’라는 표찰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하지만 그 바람에 더욱 심하게 맞았을 뿐이다. 다음날 그는 더성먼(德勝門) 근처 타이핑 호수에 투신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식 뻘의 홍위병들에게 박해 당한 많은 혁명 원로와 지식인들과는 반대로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는 도를 넘어갔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축하하는 집회가 열렸다. 광장 안에는 100만명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모였다. 그들은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노래인 ‘동방홍’을 부르면서 오래 기다린 끝에 비치는 햇살과 함께 등장한 그들의 최고사령관을 맞이하였다. 접견대에 선 마오를 바라보며 젊은 홍위병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공산주의의 대중집회는 신격화된 마오쩌둥을 위한 종교집회와 다름없었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큰 난리를 일으켜 큰 다스림을 얻는다는 대란대치(大亂大治)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란까지만 이루어지고 대치는 어디갔는지 모르게 되었다. 특히 공산당 중앙이 두 개로 쪼개져 버렸다. 새롭게 등장한 파벌은 마오의 아내인 장칭을 포함한 네 명의 극렬 좌파 인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사인방'(四人幇)이라 불렸다. 이들은 마오가 띄워놓은 열기에 편승해 정치 구호 위주의 투쟁을 벌였다. 성능이 월등한 외국 선박의 수입을 허가했던 덩샤오핑을 외국 기술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식이다. 하지만 사인방은 정규군인 인민해방군에 기반이 없었고 문혁동안 많은 군출신 원로를 숙청한데다, 인민 생활의 향상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군부와 대중의 지지 없이 마오쩌둥에게만 의지해 권력을 유지했는데, 결국 마오 사후 원로 군부파의 당부주석 예젠잉이 주도한 숙청 계획에 걸려들어 모두 체포된다. 이후 예젠잉이 지지한 덩샤오핑이 복권되어 중앙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문화대혁명에 대한 당의 공식 평가가 이때 확정된다.
문화대혁명의 공과를 논하는 것은 대다수 인민에게 신격화 되어있는 마오쩌둥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라 아주 민감한 사안이었다. 말하자면 열렬한 이슬람교 신자들 앞에서 “선지자 마호메트도 무언가 어쩌면 아마도 잘못한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운을 띄우는 격이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이를 지혜롭게 처리한다.
여전히 마오가 일으킨 문혁을 지지하던 화궈펑을 중심으로 한 파벌은 “마오 주석의 지시라면 우리는 모두 시종일관 변함없이 따라야 한다” 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덩은 마오 역시 옹호했던 실사구시 정신에 따라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实践是检验真理的唯一标准)” 라고 주장했다. 실천을 통해 옳음이 입증된 정책을 추구해야 하는데 문혁은 그렇지 못했으므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공식적으로 채택된 당 보고서의 주요 내용이다.
문혁의 좌편향의 과오, 그리고 이러한 과오가 거대한 규모로 장기간 지속된 것에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 동지에게 있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잘못된 지도하에서 행해졌으며, 이것은 다시 린뱌오 및 장칭 등의 반동세력 등에게 포섭되어 당과 인민에 수많은 재난과 혼란을 범했다. 마오쩌둥 동지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전략가, 이론가이다. 그는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에서 중대한 과오를 범했지만, 그의 전생애를 보면 중국혁명에 대한 공적은 과오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공적이 제1주의적이고, 과오는 제2주의적이다.
덩샤오핑은 문혁을 부정하면서도 마오쩌둥의 과(過)를 넘어선 공(功)을 인정함으로, 그를 숭배하는 대중의 지지도 잃지 않는 현명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니체를 읽으면 좋은 이유 IV – 삶을 사랑하는 방법
앞서 글에서 살펴본 대로, 니체는 프로이트와 융에 앞서 뛰어난 정신분석적 사유를 내놓았다. 프로이트는 정신적 힘의 원천을 ‘리비도’라고 하는 성적 욕망에서 비롯된 에너지라고 파악했다. 그는 이성적이지 않은 어두운 정신의 힘을 느끼고 그걸 통제하려 했다. 니체도 그 힘의 원천을 알아차렸지만 프로이트처럼 체계화하고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커다란 힘 전체를 사람의 운명을 펼치는 데 사용하려 했다. 아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책 구절을 읽어보자.
형제들! 전쟁과 전투는 악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미덕과 미덕 사이의 시기, 불신, 비방은 필요하지!
자네의 미덕 하나하나는 제각기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원하거든.
미덕은 제각기 자네의 정신 전체를 원하지.
자네의 정신이 그 미덕을 알리는 전령이 되기를 원하지.
자네의 분노, 증오, 사랑이 들어 있는 에너지 전체를 원하는 거야.
짜라두짜는 미덕이 서로 다투는 전쟁을 얘기하고 있다. 사람 머리 속의 정신적인 싸움이다. 각각의 미덕은 전체 정신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데 이는 ‘분노, 증오, 사랑이 들어 있는 에너지 전체’ 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합쳐진 정신의 힘으로 최고의 운명을 쫓으려 했다. 운명은 amor fati 즉 운명애(運命愛)로부터 시작하는데 운명을 사랑함으로써 운명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말은 쉽게 들리지만 실행이 쉬운 건 아닌 것 같다. 시시각각 맞이하는 상황과 그게 합쳐진 운명이 꼭 즐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짜라두짜는 다시 도움되는 말을 해준다.
그래. 우리는 삶을 사랑하지.
하지만 삶에 익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거지.
나도 삶을 사랑해.
내 경우엔 나비나 비누거품 같은 것들이
행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돼.
사람들 중에 나비나 비누 거품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돼.
삶이 저주스러워 질 때도 있고 사랑스러워 질 때도 있다. 이건 얼굴 표정과 분위기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을 밝혀 주는 존재로 느껴진다.
이제 햇빛 아래서 날아다니는 나비와 거품을 생각해보자. 햇살은 세상을 고루 비추는 사랑과 같고 나비는 그걸 날개에 쪼이며 날아다닌다. 나비는 궤도를 따르지 않고 바람과 꽃망울을 따라 팔랑팔랑 움직인다. 비누거품 역시 자유롭게 떠다니는 존재이다. 투명한 무지개 빛을 띠며 잠시 예쁘게 빛나다 사라진다. 나비와 비누거품 둘 다 이곳 저곳에서 티없이 피고지는 사랑의 마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삶에서 사랑을 잃어버리면 어떤 모습을 나타날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상실의 시대(Norwegian Wood)’ 에는 사랑 없이 허무에 빠진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기숙사 선배인 도쿄대 법학부의 나가사와와 함께 카페나 술집을 돌아다니며 하룻밤 동침할 여자를 찾는다. 나가사와는 명문 집안 출신에 일본 최고 학부를 다니는 엘리트이다. 하지만 삶에 고차원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삶의 모든 것은 게임처럼 느껴졌다.
공부에 집중해서 어려운 고시에 합격하는 것도 안면도 없던 여자를 유혹해서 하룻밤 같이 자는 것도 자기 능력을 시험하는 게임이고, 좋은 결과에 한 번 웃으며 만족하면 되었다. 나가사와 보다는 인간미가 있던 와타나베는 그의 여자 헌팅에 동참하면서도 무언가 심각하고 의미 있는 것을 찾는다. 아래는 이에 대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다. 니체가 나가사와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난다.
아, 숭고한 희망을 잃어버린 고귀한 사람들을 알지 …
한 번 그렇게 되고 나니까 숭고한 희망 전체에 대해 비웃고 다니더군.
찰나의 쾌락을 쫓아 뻔뻔하게 살더군.
그날 하루를 넘어서는 목표라곤 전혀 없이.
“정신 역시 감각적 쾌락일 뿐이다.”라고 말하더군.
정신의 날개가 부러진 거지.
부러진 날개가 정신에 들러붙어
날개에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정신을 온통 지저분하게 만든 거야.
한때 그들은 영웅이 되는 것을 추구했었지.
지금 그들은 쾌락에 빠져 사는 방탕아들에 불과해.
지금 그들에게 영웅이란 고통이고 공포일 뿐이지.
하지만 나의 사랑과 희망으로 자네에게 간절하게 부탁할게.
제발 자네 영혼 속의 영웅을 내치지 마!!
자네의 숭고한 희망을 간직해!